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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의 시네마나우] 상만 받으면 되나요?

마를론 리베라 감독의 <하수도에 빠진 여배우>가 드러내는 독립영화 배급의 문제점

<하수조에 빠진 여배우>

세계의 유수 영화제에서 작가정신이 충만한 독립영화 감독으로 인정받는 방법은? 마를론 리베라의 <하수조에 빠진 여배우>(2011)를 보면 필리핀의 경우를 알 수 있다. 첫신은 이렇게 시작한다. 슬럼가에 사는 중년부인 밀라는 아이들에게 점심을 먹인 다음, 딸을 씻기고 새 옷을 입힌 뒤 마닐라 시내의 아파트로 가서 노년의 백인 남성에게 넘긴다. 이것이 영화 속 독립영화 감독이 만들려고 하는 작품의 내용이다. 감독과 제작자는 그들의 작품이 어떻게 하면 해외 영화제에서 주목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논의를 계속한다. 로케이션 헌팅을 위해 찾아간 슬럼가는 단지 영화를 위한 훌륭한 배경에 불과하다. 이처럼 필리핀에서 디지털 독립영화는 이제 코드화되어가고 있고, 다양성이 사라져가고 있다.

롤랜도 톨렌티노 필리핀대학교 대중문화학과 교수에 따르면 필리핀의 독립영화계 안에 위계질서가 만들어졌는데, 서열배치는 독립영화 감독이 거둔 (해외 영화제에서의) 비평적 성공과 국제적인 영화 지원단체에서 제작지원금을 끌어오는 능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한다. 최상위층에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자인 브리얀테 멘도자가 있고, 그 밑에 라야 마틴, 존 토레스, 메스 구즈만 등이 있으며, 다시 그 밑에 국내 영화제서만 인정받은 감독들이 위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계질서는 국내외 국제영화제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이러한 위계질서에 대한 풍자와 조롱이 가득한 영화가 <하수조에 빠진 여배우>다.

2011년 현재의 시점에서 이러한 ‘코드화’와 ‘위계질서’에 관한 자기반성과 풍자는 분명 시의적절하다. 지난 수년간 필리핀의 독립영화가 거둔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다음 단계에 대한 고민과 방향설정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필리핀의 독립영화는 이제 배급망 확보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고 있다. 존 토레스 감독은 자신의 작품을 아예 불법 DVD 배급업자에게 넘겨버렸다. 존 토레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약간의 수입을 가질 수 있으며, (비록 어둠 속이기는 하지만) 대중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정식 배급업자들은 결코 토레스의 작품을 DVD로 출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독립영화 감독들이 제작단계의 전 과정을 혼자서 해결하는 이른바 ‘셀프 프로덕션’의 의미는 이제 세일즈와 배급까지도 혼자 책임진다는 의미로 변화하였다. 존 토레스의 시도는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차이밍량 감독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최근 대만 내에서 자신의 작품 배급을 기존의 배급라인에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나서 게릴라식 배급을 시도하였다. 대만 전역의 대학 내 극장이나 문화공간을 상영관으로 활용하였으며, 거리에 나가 직접 전단지를 나누어주는 식의 홍보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예술영화의 죽음’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데 효과가 있었고, 흥행도 기존의 배급라인을 통하는 것보다 좋았다. 문제는 그로 인해 변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지속성이 없을뿐더러 대안적 배급방식에 대한 논의로까지 이어지지도 못했다. 필리핀에서 독립영화가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영화관은 필리핀대학 영화센터, 필리핀 문화센터, 로빈슨 극장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반면 제작편수는 디지털 독립영화가 주류영화보다 3, 4배 더 많이 제작되고 있다.

<하수조에 빠진 여배우>에서 독립영화 감독과 제작자는 해외 영화제에서의 수상에만 관심이 있다. 배급과 상영에는 아무런 고민이 없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문제제기를 하는 <하수조에 빠진 여배우>는 필리핀 내에서 어떻게 상영될 것인가? 필리핀의 최고 인기여배우 유진 도밍고가 주연을 맡아서, 혹은 독립영화 출신으로 주류영화계에 안착한 크리스 마르티네즈 감독이 각본과 제작을 맡아서 상황이 나을 수는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하수조에 빠진 여배우>의 감독 마를론 리베라 스스로 풍자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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