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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다시 만난 세계는 꽃무늬

<써니>의 16살 나미 주변을 수놓은 무수한 꽃 장식에 대하여

이번에도 <써니>의 임나미씨 이야기다. 지난번에는 2011년, ‘고품격 유러피언 타운하우스형’ 아파트에 살고 있는 그녀의 현재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1986년, 서울로 막 전학 온 그녀의 과거에 대한 것이다.

해외출장을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중년의 나미는 자신의 모교로 향한다. 모교 교문 앞은 등교하는 교복 차림의 소녀들로 시끌벅적하다. 그 한복판에서 나미는 추억에 잠긴다. 그녀를 응시하던 카메라가 360도 회전을 감행하자, 그녀는 여고생으로 변신해 청재킷을 걸친 채 뻘쭘하게 서 있다. 서울로 전학 온 첫날 등굣길이다. 이 장면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25년 전의 교문 앞 풍경이다. 여고생들의 옷차림은 늦겨울의 한기가 채 사그라지지 않은 봄의 초입임을 암시하건만, 언덕길 주변에는 화사한 빛깔의 꽃들이 한데 어울려 따뜻한 봄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 기묘한 시간차는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흥미롭게도 기억의 스크린에 영사된 나미의 집 안은 온통 꽃무늬 천지다. 외할머니의 꽃무늬 스웨터부터 꽃무늬 커튼과 벽지, 꽃무늬 베개, 꽃무늬 잠옷, 그리고 꽃무늬 전기밥솥까지, 어지럽지만 리드미컬하게 울긋불긋 제 모양새를 뽐내느라 여념이 없다. 물론 단순화하자면, 꽃무늬는 여백을 견디지 못하는 ‘촌스러운’ 감수성에서 비롯된 도상(圖像)이라고 할 수 있다. 16살의 나미는 ‘나이키’라는 상징이 지배하는 세계에 아직 진입하지 못한 상태다. 1984년 LA올림픽이 알려준 취향의 신세계. 서울내기 급우들은 그 세계로 뛰어들어 나이키를 입고 나이키를 신는다. 하지만 그녀는 사투리 억양을 버리지 못한 채 꽃무늬에 둘러싸여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등굣길 장면의 시간차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해석도 가능해 보인다. 지방 군소재지와 서울특별시 사이에서 나미가 체감한 문화적 경험의 시간차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자, 이제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올 차례다. 이번에는 카메라 대신, CD가 회전한다. 조덕배의 <꿈에>가 과거와 현실을 이어주는 통로이고, 골드스타의 카세트라디오와 뱅앤드올룹슨의 베오사운드가 각각 그 통로의 입구와 출구 역할을 떠맡는다. 이 대목에서 나미는 현실로 돌아온 뒤, 여고생 딸의 교복을 몰래 입어보면서 추억을 되새김질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교복 자율화 세대에 속하는 그녀는 여고 시절 교복을 입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차라리 이런 장면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녀는 곧바로 집을 나와 백화점의 가전 매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 줄줄이 진열된 꽃무늬 냉장고 앞에서 향수에 젖은 표정을 짓는다. 여기에 때마침 소녀시대의 2007년 데뷔곡 <다시 만난 세계>가 매장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면, 안성맞춤의 미장센이 완성되지 않을까?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나 너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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