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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고독에 관한 두 가지 질문
김혜리 2011-12-23

부산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사무실 복도에 걸려 있는 <길>의 젤소미나 크로키. 페데리코 펠리니의 이 그림은 관객 한분이 기증한 것이다. 극히 모던한 건물 한켠에 작은 온기를 더하고 있는 액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자니 진품인지 복제품인지의 궁금증은 쓸데없다고 느껴졌다.

*<디어 한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1월30일

11월의 마지막 날에 어울리는 영화다. 어제의 <아리랑>에 이어 김기덕 감독의 <아멘>을 보러 갔다. 한날 동시상영으로 시사회를 진행하지 않은 주최쪽 결정은 본의와 무관하게 <아리랑>과 <아멘> 사이에 모종의 추측과 기대를 형성하는 24시간의 막간휴식(intermission)을 끼워넣었다. 창작의 벽에 부딪힌 예술가가 본인의 내장에 손을 집어넣어 병소(病巢)를 헤집는 듯한 <아리랑>을 먼저 본 관객이라면, 직후 만들어진 극영화 <아멘>에 대해 공유하는 밑그림이 있을 법하다. 즉, 살풀이 같은 <아리랑>을 통해 김기덕 감독이 3년 동안 뭉쳐 있던 정신적 울혈을 해소하고,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돌아가거나 새로운 궤도에 발을 들였으리라는 희망 섞인 예상. 그러나 내게 <아멘>은 여전히 <아리랑>의 연장선에 있는 영화였다. 아니, 어쩌면 그건 앞서 행한 처절한 간구를 짧게 확인하는 영화 제목에 처음부터 암시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변심한 남자를 찾아 대책없이 유럽에 왔다가 길을 잃었으나 예기치 못한 생명을 잉태하게 되는 젊은 여자(김예나)의 모습은, 에너지의 고갈을 괴로워하며 우연의 축복을 고대하고 있는 감독의 자화상을 불가피하게 환기시켰다. 물론 우리가 익히 아는 김기덕 영화의 서명은 <아멘>에도 살아 있다.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의 웅성이는 석상과 부조들은 김기덕 영화에서 자주 세트를 대체해온 조각공원 역할을 하고, 그곳 벤치에 곤한 몸을 뉘고 땅으로 머리칼을 늘어뜨린 여인은 아무런 특수효과 없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공중부양의 환각을 빚어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페르 라셰즈를 포함해 사크라 쾨르 성당, 사랑의 자물쇠로 뒤덮인 퐁 데자르,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 등 유럽의 명소를 소요하는 이 영화의 자못 ‘관광객스러운’ 여로가 스크린에 나열하는 풍경은, 서구세계가 본인의 영화를 훨씬 잘 이해한다는 <아리랑> 속 감독의 한탄과 짝으로 보였다. <아리랑>에서 김기덕 감독은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문제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영화를 만든다고 고백했고, 언외언의 빛나는 경지에 진입한 그의 몇몇 전작들은 과연 그 목표를 훌륭히 달성했다. 그러나 <아리랑>과 <아멘>에서 문제는 그저 날것의 문제로 남아 있을 뿐 비언어적인 각성으로 승화되지 않는다. <아리랑>은 특수하나마 ‘수기’로 분류할 수 있으니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지만, 극영화 <아멘>에서도 현실과 알레고리 사이의 장력은 허물어진 채다. <아리랑>과 <아멘>은 공히, 형식에서나 내용에서나 도전하려는 긴장을 놓아버린, 보는 이보다 만드는 이에게 더욱 절실한 영화다.

12월1일

부산에서 배우 리버 피닉스의 출연작을 소개하는 행사를 앞두고 <스탠 바이 미>(1986)를 DVD로 복습했다. 롭 라이너 감독은 극중 배경인 1959년 당시 극중 소년들과 동갑인 열두살이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마이크 앞에 앉아 영화를 회고하는 감독 코멘터리를 들으며 획득한 오늘의 깨달음은, DVD 부록 해설은 웬만하면 다수의 제작진이 둘러앉아 녹음하는 쪽보다 배우든 감독이든 비평가든 한명이 진행하는 편이 유익하다는 사실이다. 홀로 영화와 독대하는 코멘터리는 여럿이 함께 하는 그것에 따르기 마련인 동석자에 대한 배려, 화기애애함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운 덕분에 시간이 흐를수록 계획보다 솔직해지고 슬쩍 도취에 빠지기도 한다. 덕택에 관객은 자연스럽게 영화 속으로 훨씬 깊숙이 들어갈 수 있다. 누가 필름메이커의 코멘터리에서 예의와 객관성을 기대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 구역에서 그런 지루한 업무는 내가 속한 직업군이 도맡고 있지 않은가!

12월3일

십년차 1인 가구 세대주로서, 고독에 관해 오래도록 머리를 맴도는 두 질문이 있다. 1. 우리에겐 정말 외롭다는 사실이 가장 중대한 문제일까, 아니면 남들의 눈에 내가 외로운 사람으로 보일 거라는 두려움이 더 큰 스트레스일까? 예컨대, 당신은 진정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이 괴로운가? 아니면, 혼자 조조영화를 보러 온 사람으로 보이는 일이 신경쓰이는가? 2. 지상의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고독은 정상적인 생존 조건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일상에 지장이 있을 만큼 외롭군’이라고 절감하는 날, 가장 힘이 되는 위로는 역설적이게도 ‘그러나 앞으로는 오늘보다 더욱 외로워질 일만 남았어’라는 명징한 인식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면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지금이 내가 가장 덜 외로운 시간이며 오늘이야말로 더한 외로움에 대비해 단련하기에 최적의 하루니까.

2012년 예상 출판 키워드를 묻는 설문을 받았다. 내가 그런 걸 알 턱이 있나, 당장 다음 보름 동안 내가 해치워야 할 일의 순서도 모르는 깜냥에… 라고 구시렁대면서도 적어내려간 단어들은 ‘종말’, ‘노년’, ‘잘 죽는 법’이었다. 만약 인간이 죽을 때 자꾸만 가벼워져 티끌처럼 바람에 흩어질 수 있다면 혹은 그림자처럼 점점 엷어져 정오에 소멸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짊어진 근심의 상당한 몫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의도에서 신은 인간에게 묵지근하고 질척한 육체를 주고 그것을 끝까지 건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노쇠함에 따라 점점 사랑하기 어려워지는 몸, 그래서 더욱 정신을 사로잡고 행불행의 큰 부분을 좌우하게 되는 뼈와 살을 어떻게 다루고 쓰는지야말로 우리 앞에 놓인 마지막 시험이 아닐까, 시간이 갈수록 예감하게 된다.

12월5일

<디어 한나>(Tyrannosaur)의 조셉(피터 멀랜)은 분노를 관리할 줄 몰라, 자신에 대한 혐오를 침뱉듯 구토하듯 세상에 뱉어내고 다닌다. 첫눈에 그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해 뵌다. 역시 자기를 주체하지 못한 어느 날 그는 옥스팜(우리로 치면 ‘아름다운 가게’)으로 뛰어들고 옷걸이 뒤에 웅크려 패닉에 빠진다. 점원 한나(올리비아 콜먼)는 그에게 상냥하게 묻는다. “이름이 뭐예요?” 조셉은 대뜸 “로버트 드 니로”라고 응수하는데 무의식적으로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와 동일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차 한잔 드릴까요?” 대답이 없자 다시 묻는다. “아니면 당신을 위해 기도해드릴까요?” 관객은 불현듯 둘 사이의 옷걸이가 고해실의 칸막이 같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해피 고 럭키>의 포피(샐리 호킨스) 같은 캐릭터로 보였던 한나의 얼굴 뒤에는 시커먼 심연이 숨겨져 있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남자는 가라앉아가고 여자는 격앙되어간다. 인간은 정녕, 얼마나 서로 다른가. 사회가 등돌리고 이어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 아니, 어느 쪽이 먼저인지도 알 수 없는- 남자와 그녀의 진짜 현실을 아무도 모르기에 유령처럼 사는 여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디어 한나>의 이야기는 이창동의 <오아시스>를 무척 닮았다.

<디어 한나>는 도치법의 영화다. 거의 모든 장면은 원인이 숨겨져 있는 결과고 나중에야 엷은 힌트가 산발적으로 주어진다. 사실 원인은 인물이 살아온 과거의 시간 덩어리 전체다. 패디 콘시다인 감독의 각본은 조셉의 불행이 상실감 때문인지 알코올 의존 때문인지 타고난 폭력 성향 탓인지 뚜렷이 해명하지 않는다. 그는 아마 왜 이렇게 되었는지 하나의 이유를 지목하는 순간 인물을 돌이킬 수 없게 오해하게 된다고 굳게 믿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그러한 태도를 축소판으로 보여주듯, 한나와 조셉은 사람들이 어디서 다쳤냐고 물어오면 피멍든 입술로 예외없이 거짓말을 한다. 계단에서 굴렀다고, 욕실에서 넘어졌다고. <디어 한나>가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목이 탔는데 영화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내가 물병의 뚜껑도 따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나의 갈증 따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끼게 하는 영화였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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