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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슬픔이 깃든 어른-아이의 놀이

김수현 감독의 <창피해>를 통해 <귀여워>를 다시 보다

김수현 감독의 <창피해>를 보았다. 내심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자꾸 생각이 감독의 전작인 <귀여워>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해가 없길 바란다. 그 우려는 영화에 대한 우려가 아니라, 나에 대한 우려다. <귀여워>를 다시 생각해봐야 하나. 아니, <귀여워>에 대한 과거 나의 견해를 철회해야 하나. 7년 전 겨울, 평론가라는 이름을 단 지 6개월이 된 나는 <귀여워>에 대한 짧은 비판론을 썼다. <씨네21>은 그 글에 “<귀여워> 속에 드러난 가부장제를 비판한다”(482호)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 영화는 그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교환되는, 남자의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판타지, 그뿐이라는 단정적인 요지였던 것 같다. 그때는 분명 확신으로 썼을 그 글을 대단히 낯뜨거운 심정으로 다시 찾아본 다음, <귀여워>를 다시 볼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왜 2011년의 <창피해>를 본 다음 새삼스럽게 2004년의 <귀여워>를 이제야 이해할 것 같은, 전에 없는 마음이 든 것일까. 그러니 조금은 자기 고백적이며, <창피해>를 경유하여 결국은 <귀여워>로 돌아가려는 ‘퇴행적인’ 이상한 방향의 글을 나는 지금 쓰려고 한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창피해>에 대한 호평은 ‘여성들의 관계와 내면에 대한 섬세한 묘사’ 정도로 모이는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건 동성애가 아니라, 그러니까 상대가 누구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관객인 ‘나’는 정지우(김상현)이기도 하고, 윤지우(김효진)이기도 하며, 강지우(김꽃비)이기도 하다는, 보다 ‘보편적인’ 공감의 맥락인 것 같다. 그것은 레즈비언 퀴어물에 대한 관객의 방어기제일 수도 있고, 실제로 이 영화가 동성애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의도일 수도 있다. 혹은 여자들에게 동성과의 사랑은 남자들의 그것과 달리, 굳이 동성애라는 말로 범주화하지 않아도 이미 지극히 자연스럽게 밀착 가능한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화정 기자는 <씨네21> 기획기사에서 “그걸 레즈비언이라고 불러도 좋고, 동성애를 다룬 영화라고 불러도 좋다. 그건 이야기의 시작일 뿐, 진짜 이야기는 따로 있기 때문”(‘창피해도 괜찮아. 사랑은 다 괜찮아’, 832호)이라고 했고, 김수현 감독은 인터뷰에서 “여성성에 대한 탐구”라고 답했다. 어쨌든 <창피해>가 여자의, 혹은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견해는 일치한다. 아버지와 아들들 사이에서 ‘교환되는’(지난 나의 비평을 따른다면) 여자에 대한 남자들의 이야기를 하던 김수현이 지금은 전혀 다른 자리에 서 있는 걸까. 물론 그는 <귀여워>를 남자들의 이야기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내 심경의 변화에 대해서는 차차 밝히도록 하고, 우선은 <창피해>가 여자들이 주인공인 영화는 맞지만, 과연 여성성에 대한 도전적이고 내밀한 이야기인지에 대한 의문부터 말하려고 한다.

밥집 장면, 왜 중요해졌을까?

정지우-윤지우-강지우와 희진이 서로에 대한 기억과 시선 속에 얽히며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 마음과 육체를 오가는 과정에, 아니, 나와 세계, 나와 타자의 경계를 경쾌하게 무화하는 혼돈의 상태에 김수현 특유의 화법은 잘 들어맞는다. 산만한 과잉이지만 그 과잉이 가볍게 들고 나고 엮인다는 것이 이 형식의 장점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런 형식의 활력이 이 영화의 에피소드들과 인물들의 대사로 인해 종종 멈춰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형식의 활기는 이미 인물들의 관계와 내면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내용은 여전히 진부한 자리에서 그 형식에 뒤처져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느낌. 요컨대, 윤지우가 거듭 “과거는 끝나지 않은 채 불쑥불쑥 나타나 계속된다”고 말할 때나, 강지우가 “니가 내 불안을 알아?”라고 항변할 때, 혹은 이들이 어린 시절과 관련된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늘어놓을 때, 다른 영화나 소설에서도 무수히 들어본 이런 말들이 마치 이들 관계의 결정적인 국면, 혹은 이 영화의 극적인 순간과 관계되는 것처럼 작용할 때, 이 여자들의 감정은 지루해진다. 옥상에서 떨어지는 마네킹 에피소드나 윤지우와 강지우를 잇는 수갑의 알레고리의 경우도 아무리 김수현이 어른의 세계보다는 아이의 심정에, 현실보다는 판타지에 더 가까운 감독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직접적이고, 그 직접성은 오히려 이들의 내면을 어떤 편견(이를테면, 진부하고 감상적인 의미로서의 ‘소녀취향’)에 가둔다. 정지우와 윤지우가 예술적 퍼포먼스 안에서 엄마와 자궁 속 태아로 연결되는 설정과 거기서 나오는 원초적인 이미지 또한, 아무리 정치적인 맥락을 안고 있다고 해도 뭔가 새로운, 설명 불가능한 에너지로 전환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귀여워>에서는 인물들의 캐릭터도, 그들의 관계도,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리하여 <귀여워>라는 세계 자체도 아이 같았다면 <창피해>는 세계는 그대로 두고, 캐릭터에게만 유아적인 성질을 부여한 것 같다는 인상을 종종 준다. 이 영화는 특수한 상황을 보편적인 감정으로 호소하고, 특별한 형식으로 보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게 의도인지 실패인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서 보편은 상투의 다른 이름이다. 이런 이유들로 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여성성 혹은 여자들의 관계에서 별 감흥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런데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여기부터다. 여러 면에서 영화 속 여자들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두 장면 때문에 이 영화가 이상하게도 흥미롭다. 흥미롭다는 말보다는 좋아할 수 있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그 두 장면 중 하나는 영화의 마지막이다. 희진이 윤지우에게 “그 사람을 가장 사랑한다고 느꼈을 때가 언제냐”고 묻자, 윤지우는 (아마도 강지우를 떠올리며) “혼자 밥 먹을 때”라고 대답하고 영화는 허름한 기사식당에 혼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 질문과 대답 자체에 특별할 건 없다. 그러나 이 대답이 이 영화에 들어올 때, 게다가 영화의 마지막에 놓일 때, 의아해진다. 영화상으로 우리는 정작 윤지우가 강지우와 단둘이 밥을 먹는 장면, 즉 그들의 사랑이 일상성 속에서 설명되는 장면을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어떤 판타지도 끼어들 틈이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밥집 장면이 윤지우에게, 그리고 영화에 중요해진 걸까?

김수현의 영화에는 왜 엄마가 없을까?

윤지우는 지금 혼자 밥을 먹기 위해 순두부를 주문하고 잔뜩 움츠리고 주변을 의식하는 표정으로 식당에 앉아 있다. 주위에는 그녀처럼 혼자 온 아저씨들이 밥을 먹고 있다. 한 남자가 주문을 받는 조선족 여자에게 술 한잔 먹자고 칭얼거리고, 또 다른 남자가 일부러 밥집 메뉴에 있지도 않을 자장면을 시킨다. 하층민 남자들의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질펀하고 짓궂은 희롱, 혹은 일상적인 장난을 여자는 익숙하게 웃어넘기는데, 그걸 지켜보는 윤지우는 불안하고 불편해 보인다. 그때, 창밖에서 한 남자가 갑자기 폴짝폴짝 뛰며 가게 안의 조선족 여인을 향해 신나게 손을 흔든다. 수줍지만 반가운 얼굴로 남자에게 나갔다온 여인에게 맘씨 좋아 보이는 주인 여자가 말한다. “밥이라도 먹고 가게 하지.” 상황을 훔쳐보던 윤지우는 그 남자가 조선족 여인의 남편이며, 그가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생겨 아내를 만나러 왔다는 걸 알게 되고, 곧 이 여인이 부끄럽게 내뱉는 말을 듣는다. “누가 다 본 것 같은데, 창피해서.” “창피해”라는 그 말이 일순간 긴장감이 돌던 윤지우의 표정과 밥집의 공기에 일렁이자, 비로소 윤지우는 웃으며 홀로 씩씩하게 밥을 먹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영화 전반에 걸쳐 여자들이 직조해낸 감정의 순간들, 어딘지 판타지적인 이미지, 현실에서 한발 떠 있는 언어들과 좀 다른 내용물로 구성된다. 현실의 때가 잔뜩 낀 세계에 직설적인 욕망과 행동과 감정 표현이 단순하고 단단하게 뭉쳐져 있고, 그 노골적인 공기는 어울리지 않게 ‘창피해’라는 수줍은 단어의 정서로 수렴되고 있다. 내용적으로든, 미학적으로든 꾸미지 않은, 아니, 꾸밈이 불가능한, 부끄러움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날것 그대로의 일상적 순간의 등장, 그리고 그 일상적 순간에서만 고개를 내미는, 보려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수줍음의 정서. 이것은 창피를 모르는 마초적인 세계에 툭 던져진 ‘창피해’라는 단어의 울림인가. 그 단어는 영화가 생각하는 여성성의 표현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의미 부여가 별로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창피해’라는 단어는 수치심의 표현이 아니며, 여기에는 왠지 그 밥집의 세속적인 공기를 긍정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좀 진부한 묘사를 할 수 있을 따름인데, 나는 이 장면에서 마치 시궁창에 핀 꽃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건 김수현이 시궁창과 거기 핀 꽃을 동등하게 소중히 다룬 덕분이다. 앞의 장면들이 캐릭터에 의존해서 흘러갔다면, 이 장면만큼은 캐릭터와 상관없이 상황의 정서에 기대고 있다. 독특한 캐릭터들이 아니라, 상투적이고 누추한 일상적 순간들을 모아놓으니, 희한하게도 거칠지만 수줍고, 외롭지만 단단하고, 허름하지만 따뜻한 정서가 감돈다. 젠체하는 대사도, 몽상하는 이미지도, 흐릿한 기억조각도 개입하지 않는 이 명징하고 단순한 마지막 장면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문득 나는 <귀여워>에서도 이와 유사한 순간의 호흡을 놓친 건 아닐까, 새삼 기억을 더듬어보게 되었다.

또 하나의 장면은 강지우와 승려가 된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어린 강지우가 죽은 엄마의 재를 들고 절에 찾아가 어느 승려에게 “자유로워진다고 집 나가더니 겨우 스님 된 거냐?”라고 비아냥거리는 장면을 통해 이 남자가 그녀의 아버지일 거라고 짐작한다. 그런데 좀 이상한 장면이 있다. 윤지우를 떠나 절로 돌아와 108배를 하는 딸을 향해, 이 남자는 “사랑은 아무나 하나, 그 누가 쉽다고 했나”며 유행가를 염불처럼 왼다. 그러더니 쓰러진 딸의 젖은 옷을 벗겨 재우려고 하다가 문득 딸의 맨몸을 쓰다듬어본다. 그때 딸이 눈을 뜨더니 씩 웃고 만다. 그리고는 이 장면에 대한 어떤 설명도 영화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굳이 없어도 될, 여자들의 이야기에 얼룩이 될 장면. 여성성의 세계에 느닷없이 등장한 음탕한 아버지의 욕망. 아니, 아버지를 욕망하는 딸의 욕망인가. 아니, 이들이 부녀지간이 맞기는 한가? 말하자면 이 장면에서 영화는 금기를 슬쩍 툭 치고 그냥 지나가버리는데, 나는 이 위태로운 순간이 이상하게도 애처롭고 영화 전체를 통틀어 어딘지 가장 솔직하다는 느낌이 들어 호기심이 생겼다. 그런 순간들은 <귀여워>에서 늘 보던 것이다. 도덕적 맥락에서 만나서는 안되는 기의를 서로에게로 유혹한 뒤, 그걸 기표의 놀이로 시침 뚝 떼고 바꾼 다음, 거기서 어떤 영화적인 활동이 퍼져나가게 하는 것. 그런데 <창피해>의 이 장면은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여러 면에서 영화에 고립된 느낌이지, 여자들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활동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다. 이 장면은 어떤 무의식의 표출일까.

어쨌든 두 장면에 대한 애정이 <귀여워>를 다시 보도록 이끌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영화에서 순이가 소비되는 방식만큼 불편했던 건 성인 여자를 노골적으로 흉내내는 어린 소녀의 외설적인 이미지였던 것 같다. 말하자면, 금기를 전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금기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 그런데 놀랍게도 영화를 다시 보면서 지금의 나는 바로 그런 지점들에서 감흥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요컨대, 한 남자를 두고 싸우던 순이와 어린 소녀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며 함께 취하자, 소주잔이 둥실 떠오르고 소녀는 요술공주 밍키가 되고, 밍키는 다시 관능적인 순이의 이미지로 바뀌는 장면의 활기. 7년 전, 나는 이 영화가 어린 소녀의 이미지마저 착취한다고 여겼으나 지금의 나는 그 소녀가 아이를 성적으로 대하면 안된다는, 그런 이미지로 착취해서는 안된다는 어른 세계의 이중적인 도덕적 금기를 건드려보는 건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소녀의 등장은 순이를 포함한 황학동 철거촌의 모든 인물들을 아이의 세계로, 상징계 밖의 세계로 즐겁게 낮추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이쯤에 이르면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김수현의 영화에는 왜 어른 여자, 그러니까 엄마가 없을까?

영화가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일 수 있는가?

어쩌면 너무 당연한 대답. 엄마가 있다면, 아버지는 가족제도 안에 위치하게 될 것이며, 그때 아버지가 딸을, 혹은 딸뻘 되는 여자를 욕망하는 건 금기를 넘어 범죄가 된다. 엄마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김수현은 엄마는 없애고, 이 아버지는 성장하지 못한 채로 놔두거나 제도 밖으로 밀어두며 그 욕망을 좀 치졸하지만 그래도 폭력적이지 않게, 오히려 영화적으로 순수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일까. 여기저기 씨를 뿌리고 다녀서 여러 명의 아들을 둔 아버지(장선우)가 순이에게 프러포즈하며, “난 결혼을 한번도 안 해봤거든”이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차라리 투명하고 짠하다. 그것은 뻔뻔하지만 소심하고, 극단적이지만 수줍은, 김수현 세계 속 남자들의 욕망과 판타지다. 그러니 <귀여워>가 남성 판타지의 세계라는 사실은 여전히 맞다. 하지만 이제는 영화 속 그 판타지와 놀고 싶은 마음이 더 크며, 무엇보다 순이와 소녀가 철거촌을 떠나며 그 판타지에 안녕을 고하는 방식도 유쾌하게 인정할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모든 계획에 실패한 셋째아들이 낡은 아파트를 무너뜨리려고 건물에 온몸을 부딪쳐도, 물론, 건물은 부서지지 않는다. 그때, 가벼운 발걸음으로 철거촌을 빠져나오던 두 여자가 뒤돌아보며 돌을 던지자, 가차없이 건물이 허물어진다. 나도 안다. 이 영화의 공간성을, 철거촌을, 청계천의 슬픔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내게는 이곳이 자신의 부실함을 모른 체하며 안간힘 쓰고 버티는 남성 욕망의 세계로, 판타지 대상으로서의 여자가 그 세계를 벗어나는 순간, 사라져버리고 마는 세계로 보일 때가 더 흥미롭다. 어쩌면 그 세계의 안간힘은 김수현의 영화적 안간힘이며, 슬픔이 깃든 어른-아이의 놀이다.

다시 거리로 나간 순이가 “난 세상 모든 남자들이 날 좋아하면 좋겠어!”라고 천진하게 외칠 때, 물론이다, 이 문맥에는 숨겨진 말이 있다. ‘기꺼이 그런 욕망의 대상이 된 뒤, 언제든지 조약돌 하나 가볍게 던지고 나오겠어.’ 건달도 부수지 못하는 세계를 이 여자는 산뜻하게 놀고 나서 조약돌 하나로 공중분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순이는 물론이고 이 불쌍한 남자들도, 영화 <귀여워>도 뒤늦게 끌어안기로 한다. “영화가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일 수 있는가?” 감독 클레어 드니는 언젠가 질문했다. <창피해>를 경유해 <귀여워>로 돌아와 나도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해본다. 너무 심오한가? 실은 이렇게 되묻고 있다. 7년 전보다, 나는 과연 좀더 괜찮은 여자가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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