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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의 TVIEW] 어떤 자기증명

XTM <주먹이 운다2: 싸움의 고수>에서 ‘남자의 로망’을 읽다

늘 그렇듯 마감으로 하얗게 불태우던 어느 날 밤, 항상 그랬듯 일하기 싫어 미적대다 괜히 방문을 열어보니 거실에서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신나는 표정으로 TV를 보고 계셨다. 두어해 전 정년퇴임하신 뒤로 각종 미드며 일드, <나는 가수다>와 <1박2일> <위대한 탄생> 등 화제의 예능 프로그램들을 나보다 더 꼼꼼히 섭렵하고 계신 아버지지만 그날의 분위기는 뭔가 달랐다. 평소처럼 소파에 길게 드러누우신 채 심드렁하게 채널을 돌리시는 게 아니라 상체를 앞으로 당겨앉은 채 주먹을 불끈 쥐고 당장이라도 TV 속으로 뛰어들어가실 것 같은 기이한 열기에 나 역시 프로그램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슬쩍 옆에 앉았더니 화면 속에서는 웬 남자 둘이 격투기 같은 것을 하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방송이 끝나 있었다. 물론, 마감으로부터 도피하려고 일부러 딴짓에 몰입했던 것은 절대 아니다.

어쨌든 학창 시절에도 싸움판이라곤 근처에도 가본 적 없었을 것 같은 모범생 아버지를 그토록 몰입시켰던 프로그램은 XTM <주먹이 운다2: 싸움의 고수>(이하 <주먹이 운다2>)였다. 전국 각지에서 싸움 좀 한다는 일반인이 프로 격투기 선수들과 맞대결해 3분을 버텨내고, 그들끼리 다시 지역 본선을 치러 마지막에는 전국 최강의 ‘싸움 짱’을 가리는 것이 <주먹이 운다2>의 컨셉이다. 이를테면 격투기계의 <슈퍼스타 K>인데, 차이가 있다면 그들이 예선에서 만나는 상대가 <나는 가수다>급의 파이터라는 점이랄까. 그리고 한때 <니나 잘해!>니 <>이니 하는 ‘일진 만화’를 열심히 탐독하면서도 대체 왜들 그렇게 ‘이 구역 짱은 나야’에 목숨을 거는지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내게 <주먹이 운다2>는 만화보다 흥미로운 현실이었다.

목포에서 알아주는 주먹이라며 “전남 짱 한번 돼보려고요”라 호기롭게 외치던 스물셋의 꽃집 점원은 ‘지옥의 3분’ 뒤 피에 젖은 얼굴로 돌아갔고, “학교에서 짱 먹고 있다”던 30전30승 전력의 고등학생은 “프로 파이터 분들 잘하는 거 알지만 이번엔 제가 이길 것 같다”던 3분 뒤 “죄송합니다. (프로 파이터들이) 너무 센 것 같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렇듯 대책없는 패기와 자신감으로 무장했던 남자들이 패배를 인정하고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은근히 사랑스러웠다. 정신없이 얻어맞고 내려와 “뒈질 뻔했어요”라면서도 카메라를 향해 브이를 그려 보이며 씩 웃는 남자아이, 쌍검술과 도술 등 온갖 화려한 무술 시범을 펼쳐 보인 뒤 “분위기를 보니까 잘못허면 죽을 수도 있겄고, 대결은 그만두겄습니다”라며 멋쩍게 돌아선 50대 남자의 귀여움은 모두 내가 그동안 쓸데없는 허세라며 코웃음 쳐온 ‘남자의 로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싸움이라는 ‘소모적이고 폭력적이며 무용(無用)한’ 영역에 집착하는 것이 단지 남을 괴롭히거나 짓밟고 올라서기 위함이 아닌, 자기 증명이나 보호 혹은 수련의 수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 것은 학교 폭력에 시달렸던 한 도전자의 고백을 듣고나서였다. “솔직히 말해서 무서웠어요. 떨어질 거 왜 나가나. 나는 겁쟁인데.” 그래서 출연신청을 해놓고도 두려운 나머지 아프다고 거짓말을 할까 했다던 그 청년, 눈가에 생긴 신경섬유종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괴롭힘을 당하다 격투기를 배웠지만 “나는 더 강한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며 참아 넘긴다는 또 다른 청년이 ‘지옥의 3분’에 도전하고 성공하는 그 순간에는 나 역시 주먹을 불끈 쥐고 TV를 향해 다가앉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는 문득 궁금해져 <주먹이 운다2>의 ‘도전자 신청’ 게시판을 찾아가 봤다. 수백건의 신청 글들은 제목부터 흥미진진했다. “부천 핵 펀치입니다”, “가진 건 힘뿐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희 아빠가 꼭 한번 나가고 싶어 하십니다” 등. 이번주 월요일 밤에도 <주먹이 운다2>를 함께 보며 심사위원들과 정반대의 판정을 내려놓고 “빨간 장갑이 더 잘 쳤는데, 뭐 이래?”라며 분개하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 혹시…? 에이,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