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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왜’를 묻지 않는 소박함, 초라함

폭력과 스포츠의 이인삼각 <마이웨이>

한 식민지 조선인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전쟁을 경험하며 만주와 소련, 유럽의 노르망디를 경유한다. 대단한 우연이지만 때론 그런 일도 일어난다. 한장의 사진과 몇줄의 소략한 기록을 토대로 제작된 <노르망디의 조선인>(2005)이라는 SBS 다큐멘터리는 만주와 모스크바, 노르망디를 경유한 조선인의 전쟁 여정을 다룬 바 있다. 문제는 한명이 경험하기에도 기구한 우연이 두명에게 동시에 일어난다는 점에 있다. 식민지 조선 청년과 제국 일본 청년. 이 둘은 마라토너이자 라이벌이다. 일본 청년에게 마라톤이란 그의 조국 일본이 치르는 성전(聖戰)의 등가물이다. 그는 전쟁을 등지고 유학하기보다는 마라토너로서 남기를 바란다. 그에게 질주란 전쟁에의 몰두다. 하지만 조선 청년에게 마라톤이란 무엇이었으며, 그는 무엇을 위해 달리는가? 이 점이 영화가 분명하게 질문하지 않은 점이다. 이 미진함은 영화의 끝까지 이어진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진태보다 퇴보한 준식

영화는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시작해서 과거로 돌아간다. 전쟁을 플래시백하며 남성들의 전쟁 경험을 다룬다는 점은 강제규 감독의 전작인 <태극기 휘날리며>와 유사하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교전국 중 연합군에 대항했거나 견제 세력이 되었던 일본-소련-독일의 전장을 오갔던 청년들의 경험을 보여준다. 예상보다 식민지 시대 준식과 타츠오의 경쟁담이 영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 부분은 민족적인 원한의 경험을 살리며 영화의 서사를 보강한다기보다, 이들이 마라톤의 경쟁자가 된 계기를 다루고 있다. 이어 패턴이 비슷한 세편의 전장 장면이 반복되며 영화의 서사를 매듭짓는다. 영화는 크게 노몬한 전투, 제도프스크 전투, 노르망디 전투를 경계로 나뉘며 각 전투는 반복적이다. 압도적인 스펙터클은 이미 언급되었듯 2차대전을 다루었던 <에너미 앳 더 게이트>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더불어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유명한 평원 비행기 추격신까지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 이어진다.

영화가 일본 군복에서 소련 군복으로 그리고 독일 군복으로 점점 더 좋은 스타일로 갈아타는 군복 코스프레 놀이라든가, 빈티지 전쟁놀이로 보일 수 있는 것은 이 전투의 핍진함이 영화의 서사에 깊이 연관되지 않았다는 점, 즉 스타일이 피상적 과시에 그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김준식과 타츠오는 탱크나 비행기 같은 대량살상 테크놀로지 앞에서 소총만 쥔 채 맞선다. 테크놀로지 앞에서 맨몸이 겪는 고통은 <아바타>에서 봤듯이 고통스럽다. 문제는 이들이 기적같이 우연히 함께 살아남아 기이한 여정을 동행하고 있다는 납득할 수 없는 서사에 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전쟁에 동원된 인물의 내면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탱크와 전투기가 출몰하는 대규모 전장이 아니어도 괜찮다. 강제규 감독의 연출력이 서사적 사실성이 아니라 과시를 위해 발휘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서사가 아쉽다는 관객의 평가는 이러한 점에 근거하고 있을 것이다.

오다기리 조가 맡은 타츠오는 영화에서 가장 극적 변화를 보이는 인물이다. 강렬한 눈빛은 짐짓 예측 가능한 인물에 깊이감과 입체감을 살려냈다. 한편 장동건이 맡은 김준식은 상대적으로 답답한 인상을 주는 평면적 인상에 머물고 말았다. 그는 꾸준히 달린다. 고무신 신고 달리고, 인력거 몰고 달리며, 만주의 일본군 병영이나 소련의 수용소에서도 그저 달린다. 이윽고 노르망디 해변에서는 건강하게 태닝된 피부에 새하얀 러닝셔츠를 입고 눈부시게 달린다. 왜 달리는가? 그에게 이 질문은 중요치 않다. 그에게는 내면도 정체성도 없다. 영화에서 그는 일종의 기능이다. 이 기능은 다른 인물의 내면을 형성시키는 거울이자 반추물로서 작용한다. 준식은 타츠오라는 인물을 빚어내는 기능적 인물에 머물고 말았다.

어느 모로 봐도 영화의 주인공은 처음과 끝을 매듭짓는 타츠오다. 준식과 타츠오의 이입도 높은 대사들은 거의 일본어로 되어 있다. 준식은 그가 맡아야 할 입체적인 역할을 종대(김인권)에게 양도한 채 끝까지 사건의 추이를 무미건조하게 관조하는 인물에 머물고 만다. 실상 조선 청년의 욕망과 분노를 대변하는 인물은 종대이며, 준식은 끝까지 중립적인 관찰자에 머물고 만다. 원한도 없고, 증오도 없는 무구한 청년이 전쟁에 나섰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가족도, 민족도, 인권도, 세계의 평화도 아닌 병영에서의 달리기뿐이다. 귀먹은 채 노르망디 해변을 달리는 준식의 모습은 이의 결정적인 모습이다. 괴물이 괴물을 만나는 공간인 전장에서 준식은 끝까지 무구하고 무기력한 관찰자에 머물고 말았다. 준식은 피와 뼈가 튀는 전장을 누비면서 고결하고 깨끗한 품성을 잃지 않는다. 촌스러운 작명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대중적인 감성을 건드렸던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장동건이 맡은 진태의 역할보다 훨씬 퇴보했다. 일본군 병영, 소련군 수용소, 독일의 동방부대를 거치며 낯선 언어 속에서 말을 잃어가는 준식은 결국 귀까지 먹게 된다. 최종적으로 전장에서 죽어간 준식의 경험을 증언할 사람은 오로지 타츠오뿐이다. 이렇듯 준식은 점점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면서 타츠오라는 인물로 흡수되고 만다.

결국 영화의 결말에서 준식의 보호자로 타츠오가 나서면서 이들의 관계는 상호 평등한 호혜적 관계에서 보호-수혜의 관계로 변질된다. 나아가 부상당한 준식과 타츠오가 어깨동무를 하고 달리는 장면은 전쟁과 스포츠가 기이하게 뒤얽힌 이인삼각의 결정판으로 보일 정도다. 결국 영화는 왜 달리는가, 왜 전쟁하는가에 대해 질문하지 않은 채 이 보상의 장면, 가해자가 보호자가 되어 개인적으로 보상하는 장면으로 민족적 원한의 고리를 미진하게 풀려 한다. 그러면서 영화 초반의 불명료했던 민족적 감정이 매우 미지근하게 풀려버리는데,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사적 측면에선 재미없는 구조다.

스포츠는 우정을 위해 동원된다

폭력과 적대를 표상하는 방식 역시 전형적이고 반복적이다. 일본인 장교였던 타츠오의 가학적 지휘는 소련군 장교 그리고 독일군 장교가 퇴각하는 사병을 총살하는 장면에서 기계적으로 반복된다. 또한 전투를 바꿔가며 천황은 스탈린과, 스탈린은 히틀러와 등가를 이룬다. 이러한 가학의 자리바꿈 속에서 전쟁은 일종의 집합놀이를 반복한다. 노몬한 전투에서 김준식을 포함한 조선인은 중국인과 한편을 이뤄 제국주의 일본에 맞선다. 소련수용소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은 스탈린의 전체주의에 맞선다. 노르망디 동방부대에서 소수인종들은 연합군과 심정적인 한편이 되어 독일 파시즘에 맞선다.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파시즘을 적대로 삼아 비교적 분명한 집합놀이를 하고 있지만, 주인공들은 특별한 영웅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타츠오는 내면을 계발하고, 준식은 아무 생각 없이 달릴 뿐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러한 가학의 이념에 맞서는 가치는 우정 어린 스포츠맨십이다. 모든 폭력과 적대의 문제를 소박한 개인의 우정으로 돌리는 방식. 달리 말해 제국주의-전체주의-파시즘이라는 20세기의 야만적 폭력은 손쉽게 올림픽과 월드컵으로 극복 가능하다는 무구한 이념!

결과적으로 <마이웨이>는 소재의 참신성이나 두 배우의 매력을 과시적이고 반복적인 스펙터클에 매몰시켜버렸다.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인 학병의 경험담을 다룬 정창화 감독의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1965)나 일본군의 소련수용소에서의 체험을 다룬 고바야시 마사키의 <인간의 조건>(1961) 같은 영화가 주는 울림에도 채 미치지 못한다. 몇 가지 다른 결말이 가능했을 수 있다. 이들은 다시금 스탈린 부대로 돌아가 배신자로 총살당했을 수 있다. 혹시 본국으로 돌아온 준식이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되어 더 기구한 운명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다른 결말을 택했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타츠오는 준식의 이름으로 마라톤에 참여해 달리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지는 말자. 다만 전쟁은 끝났지만 스포츠는 영원하다는 것. <마이웨이>는 전쟁과 스포츠를 묶어내지만, 왜 전쟁을 하는가와 왜 달리는가에 대해서는 끝까지 돌아보지 않는다. 전쟁은 장면화를 위해 스포츠는 우정을 위해 동원된다. 특히 노르망디 해변에서 독일의 멜빵 군복을 입고 준식과 타츠오가 축구하는 장면은 관객에 대한 팬서비스를 넘어선 노골적인 장면이기조차 하다. 전쟁이라는 폭력을 올림픽 혹은 월드컵 같은 ‘스포츠적 우정’이라는 상징으로 극복하려는 시도, 이것이 압도적 규모의 스펙터클을 과시하는 <마이웨이>의 주제를 소박한 휴머니즘보다도 더욱 초라한 어떤 것으로 환원시켜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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