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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개 쪼개진 감정의 여울들 <파파>
이영진 2012-02-01

눈뜨고 보니 아빠가 됐다? 가족 소재 영화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설정이다. 굳이 <세 남자와 아기바구니>(1985)까지 거슬러 오를 필요는 없다. <과속스캔들>(2008)의 현수(차태현)도 엉겁결에 가장이 된 뒤 차차 철들지 않던가. 제 앞가림 못하고 빌빌대는 건 <과속스캔들>의 현수나 <파파>의 춘섭(박용우)이나 매한가지. 다만, 현수에게 찾아든 피붙이가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라면, 춘섭에게 찾아든 피붙이는 한 줄기 구원의 빛이다. 갑작스런 사고로 끔찍이 사랑하는(?) 아내 미영(심혜진)을 잃은 춘섭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법 체류 사실이 드러나 강제 출국 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춘섭은 미영과의 운명적인 사랑을 애써 설명하지만, 이민국 직원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비자 만료를 며칠 앞두고 10살 연상의 여자와 덜컥 결혼식을 올린 이 동양 남자의 속셈을 모를 리 없다. 미국으로 야반도주한 톱스타를 잡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간 조폭 출신 매니지먼트사 대표 도 사장(손병호) 손에 죽을 것이 뻔한 춘섭. 미국에선 튀어봤자 벼룩 신세요, 한국에선 수를 써도 파리 목숨이니 춘섭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다. “I missed you, papa!” 다섯살배기 꼬마 로지(앤젤라 아자르)의 외침이 아니었다면, 춘섭의 내일은 없었을 것이다. 일단 미국에 남아 임무를 완수해야겠다고 생각한 춘섭은 파파가 되어달라는 죽은 미영의 딸 준(고아라)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피부색 다른 다섯 아이의 아빠 행세를 하며 동거를 시작한다.

<파파>의 시작은 다소 불안하다. 춘섭이 애틀랜타 거리를 활보하며 씩씩거리며 욕지기를 내뱉을 때, 한지승 감독의 전작 <싸움>(2007)의 도입부가 연상되기도 한다. 혹여 <파파>도 정신없는 소동의 연속으로 일관하는 것 아닐까 하는 우려가 스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제각기 다른 다섯 남매가 등장하면서 이같은 걱정은 조금씩 희미해지고, 또 사라진다. 동생들을 고아원에 보낼 수 없어 춘섭을 가족의 일원으로 끌어들인 준과 도 사장의 협박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려고 아빠가 되기로 한 춘섭의 다툼만으로 드라마를 이끌고 갔다면 <파파>는 심심한 패밀리 프로젝트로 귀결되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한국 드라마 <대장금>을 끔찍이 사랑하는 고든(마이클 맥밀런), 남매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마야(메그 켈리), 랩을 입에 달고 사는 쌍둥이 악동 지미(파커 타운젠드)와 타미(페이튼 타운젠드), 그리고 테디베어를 안고 춘섭만을 졸졸 쫓아다니는 로지 등은 ‘진짜’ 아빠가 되어가는 춘섭을 끝까지 지켜보게 만드는 캐릭터들이다. 고든이 춘섭을 전하라고 부를 때, 마야가 춘섭을 사기꾼이라고 무시할 때, 지미와 타미가 춘섭을 뱀파이어 혹은 악마라고 손가락질할 때, 로지가 춘섭을 자신만을 아껴주는 파파라고 믿을 때, 춘섭은 뻔하디뻔한 캐릭터라는 낙인을 벗을 수 있다.

한지승 감독의 감정 조율은 <싸움> 때와는 사뭇 다르다. <싸움>이 끝을 향해 끊임없이 강도를 올리는 방식이었다면, <파파>는 감정의 너울들을 잘게 쪼갠다. <싸움>이 복싱을 관전하는 느낌이라면 <파파>는 탁구를 지켜보는 느낌이다. 장르와 소재의 차이에 따른 결정이었겠지만, <파파>는 시나리오 단계서부터 인물에게 할당한 갈등 곡선을 세심하게 조율한 흔적이 엿보인다. 춘섭에게 가족은 행운이기도 하고 짐이기도 하다. 춘섭의 오락가락 변심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된다. 큰 사건이 존재하지 않지만 <파파>가 지루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인 듯하다. 춘섭에게 떠밀려 오디션에 참가하는 준의 이야기가 펼쳐질 때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예정된 해피엔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파파>는 누구나 아는 결말을 포장하기 위해 깜짝 반전을 준비하지 않는다. 대신 짐작 가능한 결말로의 여정에 자그마한 굴곡들을 부지런히 새긴다. 대개 이런 장르의 영화들은 신파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한지승 감독은 감정을 강요하는 손쉬운 선택을 하지 않았다. 춘섭이 파파가 되기 위해 파파임을 포기하는 장면에서 한지승 감독은 감정 지속을 위해 애쓰지 않고 시간을 건너뛰어 마무리한다. 덧붙여 가장 눈에 띄는 배우를 꼽으라면 고아라다. <페이스 메이커>에선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줬지만, <파파>의 고아라는 가능성쪽에 좀더 점수를 주고 싶다. 극중 미영과 준의 관계가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았음에도 엄마와 동생들을 생각하는 준의 감정이 전해진다면 이제껏 발견되지 않은 고아라의 재능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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