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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hion+] 제임스 본드가 되는 날

대니얼 크레이그, 실패를 겪어본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단단한 자신감의 힘

어렸을 때, 나는 적어도 외모에 관한 한 생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공부도 더 잘하고 발표도 더 잘하는데 방송국 장기자랑에는 왜 얼굴 예쁜 OO가 학교 대표로 나가는 거야? 으아아앙~.” 울부짖은 열살 이후, 아주 오래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몇년간 몇 가지 사건(?)과 변화를 겪으면서 그런 생각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넘겨짚은, 생을 향한 나의 오해였음을 알게 되었다. 대니얼 크레이그는 그런 사실을 깨닫는 과정에서 내가 경험한 ‘몇몇 사건’ 중 하나. 직접 만나본 것도 아닌데 ‘사건’이라고까지 말하긴 좀 그렇지 않냐고? 아니, 단언컨대 그는 존재 자체로 내게 하나의 사건인 인물이다. 각설하고,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보자.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이 영화에서 대니얼 크레이그는 미중년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매력을 유감없이 선보인다. 지성과 불안이 동시에 묻어나는 눈빛, 그 눈빛과 당당한 몸짓에서 뿜어져나오는 카리스마, 그리고 위풍당당한 몸과 결합된 스타일까지. 그중에서도 스타일은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을 법한 평범한 아이템- 숄칼라 카디건, 줄무늬 셔츠, 청바지, 모직 패딩, 체스터필드 코트 등- 을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방식으로 입고 나오는데도 어쩜 그렇게 멋스러운지…. ‘그다지 좋아 보이지도 않는 옷들을 어쩜 저렇게 멋있게 입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느라 영화 상영 내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나는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야 비로소 내 나름의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그의 멋은 유행하거나 척 보기에도 좋아 보이는 옷이 아닌, 번들거리거나 거들먹거리는 분위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옷들을 ‘멋을 내야 한다’거나 ‘멋져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상태로 입은 데서 시작되었다고.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대니얼 크레이그라는 배우가 걸어온 길과 그 길을 걸으면서 그가 얻은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고. 그저 그런 배우 중 하나에 불과했고, 007이 되기 전까지는 적지 않은 실패를 경험한 탓인지 크레이그에게서는 시련과 맞서 싸우고 때로는 시련에 무릎 꿇으면서도 열심히 살아온 이들에게서 뿜어져나오는 단단한 자신감의 냄새가 묻어난다. 그 자신감이 대단할 것 없는 옷들을 대단한 것으로 보이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걸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결론. 그러니 우리 일단 열심히 가보자. 007이라는 계기가 그에겐 크게 작용했겠지만, 우리라고 007 같은 계기가 없으리라는 법 있나.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어떤 길로든 묵묵히 걷다보면 옷장 속 카디건 하나를 입고도 여자들의 환호성을 차지할 수 있는 날이 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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