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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정치적이지 않은 정치영화

<부러진 화살>, 영화 자체에 대한 비평으로 들여다보다

김명호 전 성균관대학교 수학과 교수의 석궁 사건을 토대로 재판과정을 재현한 <부러진 화살>이 사실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정지영 감독은 여러 매체를 통해 이 영화의 90%가 사실이고 10%가 허구라고 밝혔으며, 당사자인 박훈 변호사는 재판과정만큼은 사실이라고 말하고, 김명호 교수 또한 “맥락상” 100%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부러진 화살>은 김명호가 정말 화살을 쐈는가 아닌가, 만일 그렇다 해도 그것은 의도인가 우발인가를 궁금해하는 영화가 아니다. 대신 대한민국 사법부는 이에 대해 왜 궁금해하지 않는가, 어떤 방식으로 이 궁금증을 묵살하고 있는가, 에 분노의 화살을 돌리는 영화다. 당연히 이 영화에 대한 대중의 뜨거운 호응은 사법부에 대한 오랜 불신에 근거한다. 이 영화가 주는 쾌감은 말하자면, 영화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화 밖 현실의 사회적 불쾌와 맞닿은 결과다. 애초 그런 현실을 겨냥하고 만든 영화이니 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영화의 재판과정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에 논쟁이 소모되는 동안, 즉 이 영화가 현실과 맺는 접점에만 관심이 쏟아지는 동안, 정작 영화 자체에 대한 비평은 중요하게 다뤄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모든 영화는 일단 영화로 만들어진 이상, 감독이 영화의 얼마가 사실이고 얼마가 허구라고 말하든, 그것이 그 영화를 판단하거나 정당화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극영화는 그것이 얼마나 사실주의적인 입장을 고수하건 결국은 허구다. 그러니 초점은 좀 다른 곳으로 맞춰져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진짜 눈물의 공포>라는 책에서 말했다. “영화 예술이 궁극적으로 성취하는 것은 내러티브 허구 속에 현실을 재창조하는 것, 허구를 현실로 이해하도록 우리를 유인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현실의 허구적 측면을 분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이다. 리얼리즘영화가 ‘사실임직함’을 내세워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이 현실이다, 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지탱하는 환상, 그리고 그 아래의 균열, 틈을 사유하게 하는 일이다. 좋은 정치영화는 그 일을 한다. 물론 <부러진 화살>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라면 ‘이 영화는 스스로를 사실로 이해하도록 촉구하지만, 이를 통해 사법부의 공명정대함이라는 환상을 까발리지 않느냐’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틀린 주장은 아니지만 뭔가 더 해야 할 말이 남아 있다. 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부러진 화살>에서 진정 현실을 유지하는 환상을 목도한 것일까. 아니, 영화가 적시하는 사법부의 폐해가 정녕 우리가 대면해야 하는 환상의 틈일까. 이 물음을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우선 영화가 지칭하고, 기대고 있는 현실을 괄호에 묶어두고 오직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 내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하나의 메시지가 아닌, 한편의 완결된 영화로서, <부러진 화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법정 안과 밖의 영화적 온도 차

알려졌듯 이 영화에 대한 논쟁들은 온통 재판장면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의외로 중요한 건 법정을 벗어난 그 밖의 영역이다. 김경호(안성기)와 박준(박원상)의 가정사, 과거, 일상, 나아가 인물들의 성격을 보여주는 법정 밖의 이야기는 이상하리만큼 장면들의 온도나 서사적 짜임새의 측면에서 법정 안의 이야기와 잘 붙지 않는다. 재판장면에 비해 현저히 밀도가 떨어지고 상투와 신파적 상황, 정서에 기대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이 영화의 법정장면이 내세우는 건 (몇몇 법조인들의 주장처럼 거기 법적 모순이 종종 개입된다 해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리다. 절차의 적법성이 얼마나 지켜지는지를 관찰하고 고발하는 이 장면들에서 박준과 김경호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 원칙의 대변자다. 그런데 영화가 법정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이야기는, 혹은 이들의 대사나 행동, 상황은 급변한다. 법정 밖 두 남자의 일상이나 성격이 법정 안에서 와 동일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영화가 이들의 성격이나 내면을 보여주려고 하거나,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제시할 때, 영화의 논조가 매번 급격하게 감상을 허락하고 거기에 호소하고 있다는 걸 지적하려는 것이다. 그때 문제는 법정 안과 밖의 차이가 어떤 식으로든 영화적으로 충돌을 일으키며 무언가를 생성하고 있다기보다는 둘 사이의 간극이 아무 설명 없이 그저 텅 빈 채 놓여 있다는 느낌을 안긴다는 데 있다. 과거와 현재, 법정 안과 밖, 공적 영역과 개인사 사이의 이 텅 빈 간극은 영화의 의도일까, 서사적인 실패일 따름일까.

이에 대해 보다 깊게 생각해보기 위해 박준, 김경호와 관련된 몇몇 장면을 예로 들어보려고 한다. 김경호가 화살을 쏘지 않았다는 김경호와 박준의 주장이 한편에 있지만, 영화는 사건 당시를 보여주는 플래시백에서 김경호가 판사와 나뒹구는 모습만을 보여줄 뿐, 사실관계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다. 그 부분을 영화적 공백으로 남겨둠으로써 영화는 자신이 김경호의 편을 들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의 사건이 다뤄지는 방식, 그 절차의 공정성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알린다. 인간 김경호는 특이한 캐릭터이긴 하지만 영화가 그에 대한 관심을 가질수록, 그러니까 그의 내면과 성정에 매혹될수록, 그만큼 영화는 자신이 초점을 맞추는 재판과정 자체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으로부터 멀어질 위험에 처한다. 말하자면 김경호는 다른 무엇도 아닌 오직 재판과정 안에서만 무색무취한 논리를 통해서만 영화적 정당성을 입증받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영화는 좀 이상한 선택을 한다. 그가 학교에서 쫓겨나고 복직투쟁을 벌이는 과정, 판사의 집 앞에 석궁을 들고 가기까지의 분노의 과정은 최소한으로 압축하면서도 교도소에서의 일과만큼은 상대적으로 구체적인 에피소드들로 공들여 묘사하고 있다.

교도소에서도 한점 흔들림 없이 원칙을 고수하고 심지어 억울한 동료 재소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그의 모습은 김경호라는 인물에 대한 영화적 거리를 일순간 좁힌다. 우리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게 되는 것이며, 그 모습은 결과적으로 법정에서의 그의 진술에 신뢰를 더해준다. 교도소 내의 에피소드들 중에서도 김경호가 독방에서 쫓겨나 다른 재소자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에 이르면 영화의 의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런 상황은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 그런데 영화가 이 장면을 처리하는 방식, 즉 이 장면이 기입되는 위치와 이 장면이 서사적으로 마무리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김경호가 성적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영화가 제시하는 순간은 가족들이 일주일 만에 가까스로 면회에 성공한 뒤 김경호의 초췌해진 모습을 대면할 때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이미 상황이 벌어지고 난 다음 플래시백으로 그 사실을 이미지화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 부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더 설명하거나 개입할 의지가 없어 보이며 그 꼼꼼한 재판장면 묘사에 비해, 성의없이 지나쳐버린다. 그렇다면 그저 인물들 사이의 대화로 처리되거나 성폭력을 암시하는 수준에서 그칠 수도 있을 사건이 발생한 다음, 플래시백의 이미지로 굳이 기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선정성의 함정을 피해가지 못하는 이 장면은 김경호를 무고한 희생자의 이미지로 전환시키고, 무엇보다 그에 대한 감정이입의 계기를 마련한다. 법정 안, 그의 진술의 논리에 기대던, 그러니까 김경호라는 인간이 아니라 그의 언어와 논리가 대표하던 비인칭적인 합법성에 호소하던 영화가 교도소 내부의 장면들, 특히 이 장면을 거치며 김경호라는 인간에 호소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는 무고한 희생자-영웅의 이미지에 가까워진다.

서로를 보충하는 인물들

박준의 경우에도 의아한 장면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화상 그는 말과 행동이 요란하기만 하지, 영화 안에서도, 사건과 관련해서도 딱히 이렇다 할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양아치 변호사라는 이미지는 어떤 서사적 필연성을 가진다기보다는 코미디적 효과를 위해 소모되고 있다는 인상이 더 크며, 무엇보다 김경호에 비해 그의 캐릭터는 확연히 상투적이고 전형적이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영화가 딱 한번 직접적으로 설명해주는 순간이 있다. 박준의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이 기자에게 박준의 과거 트라우마에 대해 들려주는 장면이다. 그에 따르면 몇년 전, 부평 대우자동차 파업 현장에서 시위를 주도하던 박준은 함께 싸우던 노동자들이 공권력의 폭력에 희생되며 끌려가는 모습을 본 뒤로 심한 자괴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박준의 내밀한 과거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의 현재를 이해할 근거를 얻었으며, 여기까지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 기자가 회사로 돌아와 당시를 기록한 영상을 다시 보게 하고, 그 영상을 프레임 전체로 확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영화의 일부로서 대면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노동자들의 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그들의 울부짖음이 곳곳에서 들리며 그들이 끌려가고 난 자리 한가운데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는 박준에게 영화의 시선은 한참을 머무른다. 아무리 이 영화가 허구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이 사태가 영화 밖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알고 있다. 그 당시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마치 다큐처럼 찍은 이 재연영상 속, 느닷없이 현재로 소환된 피 흘리는 노동자들의 육체 이미지는, 이 영화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걸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재연영상의 이미지들이 엄밀히 말해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물이 아니라 박준에 대한, 박준을 위한, 양아치 변호사의 ‘진짜’를 증거하는 기록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큰 틀로 보자면, 앞서 언급한 법정 안과 밖의 영화적 온도 차이, 지향점의 간극은 충돌하는 것도, 서사적 실패도 아니라 영화의 의도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일면 과도하게 감정적인 법정 밖의 영역은 법정 안의 이성적인 영역과 배치되거나 한쪽을 해하기보다는 실은 서로를 보충해주는 효과를 내고 있다. 인물로 보자면 이성적인 원칙주의자 김경호와 감정적이고 다혈질적인 박준의 관계도 그러하다. 과거(과연 김경호는 화살을 쐈을까 안 쐈을까. 말하자면 석궁의 진실)가 아니라 현재(그는 얼마나 합법적이고 논리적으로 주장을 전개하고 있는가, 말하자면 절차적 적법함)로 그 존재가 정당화되는 김경호와 현재(박준은 지금 이슈를 몰고 다니지만, 때때로 겉만 요란하거나 무기력하다)가 아니라 과거(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트라우마가 있다)로 정당화되는 박준.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고 종종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서로 다른 두 사람, 분리된 개체들로 읽히지 않는다. 게다가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두 남자가 공유하는 위상이 환기될 때, 김경호와 박준은 서로를 보충하며 어떤 이상적인 하나의 상으로 구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환상으로 지탱되는 영화

그렇다면, 이처럼 법정 안과 밖이, 공적 영역과 개인사가, 과거와 현재가, 나아가 김경호와 박준이 각자의 결핍된 구멍을 서로 메워주면서 형성하는 이 이상적인 상의 정체는 무엇일까. 정의? 민주주의? 혹은 반MB전선? 그 정체가 무엇이든 영화가 이상적인 상을 구축하는 동안, 한편에서는 그것이 맞서는 적이 선명해진다. 앞서 말했듯 어딘지 불균형한 이 영화의 구조, 이 영화의 인물들은 결국 그렇게 상정된 적 앞에서 서로의 결핍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대신, 그 결핍을 봉합하며 그야말로 대동단결한다. 여기서 영화의 적이 법을 ‘올바르게’ 집행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오만한 사법 권력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명징한 주장 앞에서 우리가 피해가서는 안되는 물음이 있다. 이때, 김경호와 박준의 적은 사법부지만, 영화와 우리의 적 역시 그렇다고 간단하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법이라는 객관적인 실체를 상정해두고 영화는 지금 그걸 악용하거나 위반하는 사법부와 그걸 최대한 원칙대로, 결국은 정의롭게 지키려는 김경호를 구별하지만, 실은 이 둘 모두 법이라는 초자아의 환상을 공유하는, 그 환상에 맹목적인 양극일 따름이라면 어쩌겠는가. 좋은 보수와 나쁜 보수, 혹은 진보와 보수, 혹은 정의와 폭력을 가르는 객관적인 경계란 없고 양 진영이 하나의 틀 안에서 언제나 서로를 품고 있다면 어쩌겠는가. 오해가 없길 바란다. 나는 지금 사법부나 김경호나 결국 똑같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부러진 화살>이 사법부를 겨냥하며 적을 외재화시키는 동안, 영화 자신은 지금 어떤 환상을 생산하며 거기 기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영화에서 김경호는 “법은 그 자체로는 아름다운 겁니다. 수학처럼 문제가 정확하면 답도 정확하지요”라고 말한다. 영화가 법에 관한 한, 그의 이런 논리에 동의를 표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그 논리를 차용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다. 적을 명확히 겨냥하면 정의도 실체화되지요. 혹은 정의가 실체화되면 적이 명확하게 보이지요. 궤변이라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위대한 정치영화는 올바른 문제가 올바른 답을 내는 과정의 명쾌함이나 올바른 문제가 옳지 않은 답을 낼 때의 분노를 쫓지 않는다. 대신 우리의 삶 안에서 문제와 답이 어긋날 때, 그 구조의 취약함, 모순과 분열을 대면하며 그 자신도 위태롭게 흔들린다. 정치(영화)는 결국 해결될 수 없는 질문이어야 하며, 내 편을 찾아 믿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어둠을 헤매며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것이다.

<부러진 화살>은 사실적인 제스처를 취하면서 실은 은밀하게 환상의 막을 가동시켜 그 환상으로 지탱되는 영화다. 그 환상은 불행한 시대를 견뎌온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그 카타르시스만으로도 이 영화를 기꺼이 지지하는 견해도, 이 영화의 시의 적절함을 옹호하는 주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쩌면 같은 이유로 이 영화에 동의하기 망설여진다. <부러진 화살>은 정치적인 지향점은 더없이 확고하지만, 충분히 정치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정치)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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