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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진의 미드 앤 더 피플] 복수는 캐나다산이 제맛?
안현진(LA 통신원) 2012-02-17

<리벤지>의 에밀리 밴캠프

<리벤지>

“복수는 천천히 하는 것이 제맛”(Revenge is a dish best served cold)이라는 말이 있다. <ABC>의 TV시리즈 <리벤지>를 설명할 때 미디어들이 빼놓지 않고 변주하는 단골 문구이기도 한데 “복수는 뜨겁게 하는 것이 제맛”, “복수는 조각조각내어 하는 것이 제맛” 등 응용은 무궁무진하다. <리벤지>는 한을 품은 주인공이 공들여 설계한 복수를 하나씩 이뤄가기 위해 가짜 신분을 사용한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플롯을 따른 TV시리즈로, 소년원 시절 만난 친구 에밀리 손과 신분을 바꾸고 고향으로 돌아온 아만다 클락(에밀리 밴캠프)이 이 드라마의 ‘암굴왕’이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테러리스트를 도와 여객기를 추락시킨 혐의로 아버지가 체포된 뒤 아만다는 ‘테러리스트의 딸’이라는 낙인이 찍혀 세상을 증오하며 자랐다. 하지만 성인이 된 뒤 아만다는 감옥에서 살해당한 아버지가 남긴 편지와 증거들을 통해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진실을 알고 복수를 준비한다. 아만다 클락이 아닌 에밀리 손이 되어 햄튼의 사교계에 입성한 아만다는 자신의 불행에 조금이라도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물론 마지막 상대는 아버지의 연인이었으면서도 그 사랑을 배신하고 아버지를 모함한 남편에게 돌아간 빅토리아 그레이슨(매들린 스토)이 될 터다.

복수는 차가워야 제맛이라지만 아만다의 복수가 천천히 진행되는 동안에 복수를 방해하거나 가속하는 자극적인 소재들은 어김없이 등장해 재미를 더한다. 어린 시절 함께 뛰놀던 잭과 계획의 일부로 다가갔으나 어느새 남다른 감정을 품게 되는 빅토리아의 아들 대니얼 사이에서 에밀리가 느끼는 삼각관계, 빅토리아의 딸이 실은 아만다의 이복동생이라는 출생의 비밀 등이 그러하다. 이렇게 이른바 ‘막장드라마’를 완성시키는 필수 요소들이 <리벤지>에는 종합선물세트마냥 모여 있다. 즉, <리벤지>는 <멜로즈 플레이스> <다이내스티> 등 전통 막장극의 본고장인 미국 소프오페라의 기본 틀에 빈부와 계급 등 기성세대의 유산에 도전하는 젊은 세대의 반격이라는 최신 트렌드를 더한 21세기형 소프오페라다.

<리벤지>의 또 다른 재미는 신선한 얼굴들이다. 아만다 클락/에밀리 손을 연기하는 에밀리 밴캠프는 그중 눈에 띄는데, 주인공이어서가 아니라 전형에서 벗어나는 얼굴 덕분인 것 같다. 캐나다 출신인 그는 쌍꺼풀 없는 눈과 얇은 입술을 가진 미인으로, 긴 팔다리와 마른 몸이 스크린에 등장할 때면 도톰한 입술과 둥근 눈의 여배우들과는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개인적인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미국 출신이 아닌 영어권 배우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았는데, 에밀리 밴캠프 역시 이런 생각에 무게를 더했다. 최근 미국 TV시리즈에서는 캐나다 출신의 여배우가 주인공 자리를 꿰차는 걸 쉽게 볼 수 있었다. <캐슬>의 베켓 형사 역의 스타나 캐틱,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의 로빈을 연기하는 코비 스멀더스가 그러하고, <팬앰>의 콜렛 역시 퀘벡 출신인 카린 바나스다. 한때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남자배우들이 할리우드 주연급으로 등장해 무서운 속도로 자리잡았던 걸 기억해보면, 캐나다 출신 여배우들의 강세 역시 트렌드로 읽어봄직하다.

<리벤지>에는 예상 못한 재미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주인공의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바라는 이상한 마음이다. 아만다가 지나치게 철두철미하게 준비해놓은 복수의 계획이 이런 모순된 심리를 만들어낸 주범이다. 그의 복수가 서늘하고 잔인하게 성공하기를 바라면서도, 언젠가 들통나 큰 위기가 다가올 클라이맥스가 기대되기에, 나는 매번 다음 회를 기다린다. 이런 길티플레저가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