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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 “가족 에고이즘이 자본주의의 본질 아닐까”
주성철 사진 오계옥 2012-02-17

<하울링> 유하 감독

유하 감독을 바람 부는 날 압구정동에서 만났다. 1995년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에서 ‘수음 아니면 절망’이라며 ‘모든 금지된 것들을 열망’하던, 그러니까 ‘시인 유하’의 청춘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제가 쉰살 생일”이었다는 그의 말에 순간 ‘덜컥’했다. 이제 그는 10대의 아들을 둔 감독 유하로 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소외’라는 그의 변함없는 테마는 <하울링>으로도 이어진다. 그러면서 작가 출신 감독에게서 다른 이의 원작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궁금했다. 원작의 늑대개를 보며 자신의 오랜 관심사인 ‘타자’, 그리고 ‘가족’의 의미를 떠올렸다는 그의 말에서 이전작들과는 사뭇 다르고도 비슷한 스릴러 <하울링>을 만든 그를 만났다.

-노나미 아사의 원작 <얼어붙은 송곳니>는 언제 접했나? 지난 몇년간 국내에서 일본 스릴러 소설들이 큰 인기를 얻었는데, 왜 이 작품을 선택했는지 궁금하다. =2010년 초에 우연히 읽게 됐다. <쌍화점> 끝내고 현대물을 준비하다가 문득 이 작품에 내가 작품으로 하고 싶은 요소들의 편린이 보였다. 강력계 수컷 형사들 사회에서 버티는 여형사라는 캐릭터가 가장 끌렸다. 그리고 늑대개라는 범상치 않은 이미지가 내가 늘 관심을 가졌던 타자들, 국외자들이라는 테마와 겹쳐졌다. 그리고 사실 난 늘 시집만 보는 사람이다. (웃음) 그런데 주기적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직업 영화감독이라는 자의식은 필연적으로 ‘아이템’을 갈구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내 이야기가 고갈돼가고 있다는 생각에 한동안 히가시노 게이고 등 일본 소설들을 좀 읽었다. 그런 와중에 만난 작품이 바로 <얼어붙은 송곳니>다.

-원작자와는 어떤 얘기를 나눴나. =노나미 아사 여사가 관심이 컸다. 한류 드라마에도 관심이 많고 송강호도 잘 알고 있더라. (웃음) 일본에서는 100만부가량 팔렸는데 영화화가 안된 이유에 대해 물어보니 애견문화가 발달한 일본임에도 역시 늑대개 그 자체가 문제였다. 있던 늑대개도 죽었으니 제대로 된 영화화가 불가능하다는 거지. 그러면서 한국에 괜찮은 늑대개가 있냐고 했다. 일본에서 TV드라마로 만들어진 적이 있는데 그건 누가 봐도 시베리안 허스키였다며 제발 그럴싸한 놈으로 써달라고 했다. (웃음) 그 역시 작품의 핵심이 늑대개라고 생각하는 거다. 사실 할리우드에도 늑대개와 조련사를 수소문했다. 늑대개가 꽤 있긴 한데 조련사까지 함께 묶어서 패키지로 공수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에 출연한 ‘시라소니’라는 개를 만났다. 에단 호크가 나온 <늑대개>(1991)의 화이트 팡 정도는 아니고 셰퍼드보다 좀 큰 정도인데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조인성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눈빛이 까칠했다. (웃음)

-이전 인터뷰에서 송강호 같은 배우와 함께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얘기를 한 적 있더라. =그땐 송강호가 진짜 주인공으로 전면에 나서는 영화를 의미한 거였다. 사실 여형사를 먼저 캐스팅해야 맞는 영화인데 먼저 시나리오를 읽게 된 송강호가 일주일 만에 하겠다고 했다. 제작자는 농담처럼 ‘이럴 때 시나리오를 건네서 퇴짜를 먼저 맞아놓으면, 다음에 진짜 캐스팅하고 싶을 때 미안해서라도 하지 않을까’라는 얘기를 했는데 덜컥 한다는 거다. 처음에는 반갑다기보다 솔직히 좀 충격을 받았다. 나로서는 영화의 ‘부록’ 같은 캐릭터인데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다며 한다니까 너무 고맙고 큰 빚을 진 것 같았다. 송강호의 장점은 어디에 속해 있건 자연스럽다는 거다. 원래 거기 있던 사람처럼 연기하니까 그게 바로 최고의 연기다. 내가 기자간담회에서 그를 두고 ‘열연을 하지 않아 좋다’고 해서 오해를 좀 샀는데(웃음) ‘열연을 넘어선 열연’이랄까.

-그럼 이나영은 어떻게 캐스팅하게 됐나. =사실 이전부터 잘 파악하지 못했던 배우다. 물론 조인성도 그런 상태에서 <비열한 거리>와 <쌍화점>을 통해 함께 만들어가는 맛이 있었다. 첫 미팅 자리에서 이나영이 ‘저 루저예요’ 그러더다. 그렇게 CF를 많이 하는 미녀배우가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좀 충격이기도 했지만 전혀 가식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굉장히 오래도록 활동했지만 영화계에서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오지 못했고 늘 좀 고독하고 은둔하는 그런 아웃사이더 같은 캐릭터였다. 늘 나의 ‘촉’과 ‘감’을 믿는 편인데 일단 이나영은 눈이 되게 좋다. 영화에서 여주인공과 늑대개가 서로 바라볼 때 묘하게 눈빛으로 통하는 느낌이 무척 중요하다. 어쩌면 이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거기서 현실성도 있되 몽환적이기도 하고 신화성, 동화성 등이 뒤엉킨 감각을 뿜어내야 한다. 일단 우리 아내가 조인성의 팬이었고 TV드라마 <아일랜드>에서의 이나영 팬이어서 적극 밀었다. (웃음)

-그런데 미리 송강호가 캐스팅됐다는 점은 어쩔 수 없는 ‘균형’의 문제를 야기할 것 같다. 여주인공 단독 드라마나 다름없는 영화에서 관객은 송강호라는 이름값을 기대할 테니까. 그러다 보니 원작에서 여주인공 오토미치 다카코의 가족 얘기는 영화로 옮겨오며 상당 부분 생략됐다. =맞는 얘기다. 송강호라는 배우가 남자 파트너로 들어오는 순간 관객을 배신하면 안된다는 생각도 강하게 생겼다. 아까 ‘반갑다기보다 충격이었다’는 의미가 바로 그거다. 당신이 얘기한 가족 에피소드 등 이미 써놓은 시나리오를 바꿔야 하는 지점들이 생겼으니까. 그렇다고 러닝타임을 늘릴 수는 없는 거고. 정말 눈치 보지 않고 갈 생각이면 다소 재미가 떨어지더라도 여형사의 감정 본래에 충실하려 했을 거다. 하지만 그런 수정을 가하며 송강호의 비중을 늘린다고 해서 주제의식이나 본질이 크게 변질되지 않는다고 봤다. 오히려 효과적으로 압축하면 늑대개와의 긴장을 더욱 살릴 수 있을 거라 봤다.

-역시 전반적인 정서를 지배하는 것은 고군분투하는 이나영의 감정이다. 큰 짐을 짊어진 주연배우로서 늑대개뿐만 아니라 감독과의 긴장관계도 만만찮게 있었을 것 같다. (웃음) =이나영의 장점이자 단점은 특유의 무표정이다. 충돌이라고 할 것까진 없는데 그런 점들을 좀 지적하긴 했다. 희로애락을 즉각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무표정한 것이 어떤 장면에선 맞지만, 형사라는 캐릭터가 즉물적으로 접하게 되는 여러 순간순간에 자신의 감정이 확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뒤로 가면서 만족스러웠다.

-실제로 여자 강력계 형사들을 만나기도 했나? 영화에서 또 다른 핵심은 남자들이 지배하는 강력계에서 홀로 버텨선 여형사의 모습이다. =물론이다. 서울에도 채 10명이 안되더라. 모두가 은영(이나영) 같은 일을 겪는 건 아니지만 역시 버티기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적당선을 타야 한다’는 것에 대한 공감이 있었다. 남자들의 질투가 더 강하다고나 할까. (웃음) 그런 수컷사회에서 자의식을 갖고 꿈을 잃지 않으려는 심리도 마찬가지였고. 영화에서 선배가 초동수사가 어쩌고 하면서 은영을 혼내지만 사실 전날 자신과 ‘블루스’를 추지 않아서 그렇게 야단치는 거 아닌가. 그런 건 우리 직장사회 전반에 만연한 거다. 그리고 영화에서 상길(송강호)은 귀양 비슷하게 떠나지만 사실상 승진을 한다. 반면 은영은 자신의 추리가 맞았다는 것을 마지막에 증명했지만 다시는 강력계로 돌아오지 못한다.

-<하울링>을 두고 가족영화라는 얘기를 누차 강조했다. 어떤 의미에선가. =원작을 보면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문장은 ‘네가 흘리는 행복의 눈물은 다른 가족의 피눈물’이라는 대목이었다. 영화에서 딸과 영상통화를 하며 걸어가다가 늑대개에게 물려 죽는 악당도 실은 얼마나 가정적인가. 남의 가정을 파괴해 지금의 가정을 꾸리고 있는 거다. <비열한 거리>도 결국 내 ‘식구’를 위해 다른 식구를 짓밟는 얘기다. 내 자식을 위해 남을 해하는 그런 가족 에고이즘이 자본주의의 본질 아닐까. 나 역시 결혼 안 하려다 한 사람이어서 어쩌다 자식까지 기르는 마당에 반성 많이 한다. (웃음) 내가 말하는 가족영화란 가족의 따뜻함을 무작정 찬양하는 그런 휴머니즘이 아니다. 끝없이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는 가족주의의 이기심의 고리다. 그걸 상징하는 것이 바로 단지 복수를 위해 길러진 늑대개라는 타자의 존재라고 봤다. 인간이 자신의 사악한 욕망을 심기 위해 늑대개를 인간 이상으로 대하는 그 아이러니.

-당신 영화의 주인공들인 조인성과 이나영은 영화에서 어딘가 소외된 국외자의 느낌이 있다. 늘 자신이 속한 조직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밀려나는 느낌이랄까. 그것이 당신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그 무엇 같다. =데뷔작인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는 내 필모그래피에서 지우고 싶은 작품이긴 하지만(웃음) 거기서도 주인공은 시인도 오렌지족도 못되는 산책가 같은 인물이었다. <말죽거리 잔혹사>도 제도교육 바깥에서 서성거리는 아이들이고, <쌍화점>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인물이다. <하울링>의 은영도 이혼 이후 제대로 된 가족의 구성원이 되지 못하고, 직장인 강력계 형사조직 내에서 여자도 형사도 아닌 인물이다. 그런 은영이 자신과 같은 처지인 늑대개를 만나게 된다. 늘 어딘가 화합하지 못하고 떠돌고 소외된 인물들에 관심이 간다.

-이번 작품도 역시 당신이 얘기해왔던 ‘무기교의 기교’를 보여준다. 화려할 수 있는 부분들에서도 의도적으로 덜어낸 느낌이다. =언제나 느끼지만 체질적으로 그게 잘 안된다. (웃음) 뭔가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손발이 오그라들고 그냥 ‘정직하게 찍자’ 그렇게 된다. 라스트의 늑대개 질주장면도 원작의 도쿄 외곽도로처럼 차들이 충돌하고 전복되면서 스펙터클하게 찍어낼 수 있다. 그런데 어딘가 연민과 페이소스가 담긴 질주장면을 만들고 싶었다. 차들이 뒤집히는 소리보다 늑대개의 숨소리를 듣고 싶었다. 게다가 엄연히 피해자들이 많은 미성년 성범죄를 다루고 있으니 전반적으로 선정적으로 다루고 싶지 않았다. 원작에서도 악당들이 주사를 맞고 범죄를 저지르고 하는 장면들이 있는데 그런 걸 담아내기가 부담스럽고 꺼려졌다.

-‘아스팔트 위를 질주하는 도시의 늑대개’라는 설정 자체가 초자연적인 느낌을 준다. 언제나 리얼리즘에 끌려왔던 당신에게서 의외의 정서다. =오래전에 <나자리노>를 정말 좋아했다. 사람 속에 늑대가 있다는 설정이 동화나 신화적인 느낌을 줬다. <하울링>의 늑대개도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 존재한다. 늘 현실의 시간에 있다가 <쌍화점>을 하면서 사극의 재미나 품격을 알게 됐다면 <하울링>을 하면서는 판타지라는 감각을 옅게나마 느껴본 것 같다. 그러면서 그런 현실과 판타지의 접점을 무의식적으로 모색했고 어떤 식으로든 내 안에 녹아들었을 거다.

-현재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면. =<얼어붙은 송곳니> 자체가 여형사 시리즈의 첫 번째다. 그래서 <하울링>이 잘되면 그렇게 시리즈로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어쨌건 현재로서는 특별히 구상하고 있는 게 없다. 주변에서는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 이후 ‘폭력 3부작’의 마지막을 완성해보라는 얘기도 한다. 무엇보다 어떤 작품이건 올해 안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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