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시네마 나우
[유운성의 시네마나우] 걸작을 다시 깨우다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주목할만했던 특별전과 회고전들

미코 니스카넨의 <여덟발의 총성>.

지난 2월5일 폐막한 로테르담영화제는 세명의 신인감독- <달걀과 돌멩이>의 황지, <클립>의 마야 밀로스, <서스데이 틸 선데이>의 도밍가 소토메이어- 에게 타이거어워드(대상)를 안겨주었다. 수상작들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여성감독의 데뷔작이라는 것, 로테르담에서 월드프리미어되었다는 것 그리고 수상의 영예를 안기엔 수준이 못 미치는 작품들이었다는 것이다(다만 <클립>은 포르노를 방불케 하는 몇몇 장면 때문에 영화제 기간 내내 입에 오르내리긴 했다).

사실 올해 로테르담의 하이라이트는 경쟁부문이 아니라 각종 특별전과 회고전쪽이었다고 여겨진다. 가령 감독, 평론가 그리고 영화제 디렉터인 피터 폰 바흐의 세계를 집중조명한 회고전에서는 미코 니스카넨의 자연주의적 걸작 <여덟발의 총성>(1972)이 (폰 바흐의 다큐멘터리 <미코 니스카넨 이야기>(2010)와 함께) 특별상영되었는데 핀란드 바깥에 이 영화가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히 영화평론가 게이브 클링거가 큐레이팅한 <쓰레기의 입구: 상파울루의 서브컬처와 섹스 1967~1987>은 자국 바깥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브라질 B급영화의 계보와 그 독특한 라블레적인 세계를 개괄함으로써 망각의 심연 속에 있던 것을 동시대적인 이슈로 되살리는 영화 프로그래밍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상파울루 중앙역 뒤편의 홍등가로, ‘쓰레기의 입구’(Boca do Lixo)라는 경멸적인 별칭이 붙여진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영화제작사에서 생산된 저예산 B급영화들은, 1960년대 브라질영화를 대표하던 글라우버 로샤와 넬손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 등 시네마 노보 영화인들의 작업과 주류상업영화의 빛에 가려 그간 브라질 영화사(史)에서조차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었다(하지만 정작 당대 브라질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유일한 영화는 바로 이 ‘보카영화’들이었다고 클링거는 지적한다). 상영작 목록에는 로게리오 칸젤라의 <레드 라이트 밴디트>(1967)처럼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나 주제 모지 카마린스의 <야수가 깨어나다>(1970)와 조아킹 페드로 지 안드라지의 <열대의 길>(1978)처럼 최근 재조명되고 있는 감독들의 덜 알려진 수작들도 포함된 한편, <코러스 라인>을 하드코어 포르노로 패러디한 클라우지우 쿠냐의 <오! 헤부세테이우>(1984)처럼 보카영화의 상업적 극단을 보여주는 영화도 있었다.

이 특별전을 통해 완전히 (재)발견된 작가로 오스왈두 칸데이아스를 꼽을 수 있겠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지난 2007년 세상을 떠났다. 당대 상파울루 빈민가와 도심의 풍경을 더할 나위 없이 생생히 담아내면서, 빈곤을 미학화하는 사이비 리얼리즘에 기대기보다는 브뉘엘의 초기영화나 마야 데런의 몽환적 실험영화를 연상케 하는 스타일을 실험한 <마진>(1967)과 이러한 실험을 그 한계까지 밀어붙인 <옵션: 혹은 고속도로의 장미들>(1981)은 보카영화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고 심오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칸데이아스는 한때 대단한 활기로 넘쳐났던 보카 구역 영화인들의 일상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민속지적 기록들도 남겼다. 그 가운데 <보카의 파티>(1975)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당시 보카 영화인들은 연말이 되면 한해 동안 만든 보카영화들에 대한 길거리 시상식을 개최하며 맘껏 즐기고 우애를 다졌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대항문화의 열기와 그 유산, 그리고 대중의 욕망이 만나 탄생한 희귀한 결과물인 보카영화는, 할리우드와 유럽의 작가영화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하던 이들이 실패한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모든 길을 무람없이 가로지르는 흥겨운 광인들의 행렬을 시작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