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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도취와 과잉은 아닌가

<토리노의 말>에서 우리가 경험한 것은 진정 영화적 소멸인가의 문제에 대하여

알려졌듯, 1889년, 니체가 끌어안고 울던, 채찍질을 당해도 꿈쩍 않던 그 말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에 대한 상상에서 출발한 <토리노의 말>은 한 세계의 죽음을 보는 영화다. 벨라 타르도 <토리노의 말>이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영화”라고 간명하게 정리한 바 있다. 마부가 말을 끌고 집으로 돌아온 날부터 6일째 되는 날까지의 반복되는 일과, 그러나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실은 점차 죽어가는 날들의 이야기, 아니, 이미지들이 이 영화의 전부다.

많은 평자들이 벨라 타르의 전작들, 특히 원작자이자 각본가인 라즐로 크라즈나보르카이와의 공동작업들(<파멸> <사탄탱고> <런던에서 온 사나이>)에 대해 말할 때마다 그의 영화를 구성하는 ‘물성’(物性)은 늘 중요한 화두로 다루어졌다. 요컨대 “크라즈나보르카이 소설의 특별한 점은 그것이 비참함의 정적 조건보다 퇴락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붕괴된 세계가 아닌 지속되는 붕괴의 묘사. 이는 타르 영화의 핵심이 되었다. 단조로운 느림 속에는 이처럼 가차없는 파멸의 시간이 담겨 있으며, 영겁회귀는 불가피한 형식이 되었다”, 혹은 “반복과 무한히 느리고 가차없는 격리를 통해 구체적인 역사적, 사회적 상황으로부터 가장 세속적이며, 완전히 몰락한 데다 가장 극단적이고, 진정 기이하게 보이는 세계를 끌어낼 수 있었다”라고 헝가리의 영화학자 안드라스 발린트 코바치는 썼다. 그때, 단조롭고 느리며 무표정하게 반복되는 카메라워크의 시간성, 즉 타르의 저 유명한 롱테이크는 추상성과 구체성, 리얼리즘과 인공성의 경계 위에서 초월이 아닌, 타락을 대면하는 세계를 표현하는 데 필연적인 미학으로 이해되어왔다.

죽음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

여전히 크라즈나보르카이와 함께한 <토리노의 말>은 형식과 주제 면에서 기본적으로는 전작들과 유사하나 가장 미니멀하게, 그러나 가장 극단으로 치달은 영화다. 그것이 단지 “죽음에 대한 영화”라는 내용적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신의 죽음, 인간의 죽음, 한 세계의 죽음을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폐쇄된 공간에서 우물이 마르고 빛이 사라지고 결국 생이 사라지는 과정을 영화라는 물성의 소멸 과정과 함께, 혹은 그것을 통해 어떻게 재현해낼 것인지의 문제에 있다. 쉽게 말해서 내용이 죽음으로 사라지는 과정과 형식이 어떤 식으로든 점차 눌려 사라지는 과정을 어떻게 겹쳐둘지를 푸는 데 이 영화의 야심이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게다가 벨라 타르의 공언대로라면 이 영화가 그의 마지막 영화인 셈인데, 광대한 형이상학적 스케일을 펼쳐내던 감독이 자신의 영화적 세계를 끝내는 방식, 그 형식의 끝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두개의 끝, 무(無)를 향한 동일한 매혹 혹은 동일한 숙명, 즉 세계의 끝과 영화라는 물성의 끝을 향한 과정이 여기 동시에 존재한다. 벨라 타르의 예의 그 견고한 형식이 이 마지막 영화에서도 필연적이라면, 그건 신이 죽은 세계에서 아직은 살아남은 카메라가, 혹은 영화가, 어디에 위치해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견디며, 궁극에는 어떤 식으로 그 세계와 같은 운명을 짊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관련이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중요하게 언급되는 롱테이크는 그것의 시간적 지속성 혹은 관찰의 중립성 때문이 아니라, 실은 롱테이크가 시작된 자리 혹은 카메라가 놓인 위치를 물을 때 중요해진다.

카메라의 자리와 관련하여 몇몇 이상하고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셋쨋날, 아버지와 딸이 식사를 하는 중에, 창밖으로 집시 무리가 언덕을 넘어서 이들의 집 근처 우물에 당도한다. 집시들을 쫓아버리기 위해 딸이 밖으로 나가지만 그들에게 희롱만 당하자 아버지가 뒤쫓아나간다. 그렇게 인물들이 모두 나간 뒤에도 카메라는 창 너머 그 광경을 구경할 뿐 다소 냉정하게도 집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창밖에서 거센 바람이 불고, 아버지와 딸만이 그 바람에 휘청댄다. 카메라는 창밖의 바람 소리를 들으며 침착하게 서 있다. 그런데 넷쨋날은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집시들이 떠나고 난 다음날 아침, 우물이 마른 걸 알게 된 부녀는 병든 말을 데리고 짐을 싸서 집을 떠난다. 이들이 폭풍을 헤치며 힘겹게 언덕을 오르고 언덕 밑으로 사라질 때까지 카메라는 그저 집 앞에 머무르며 롱숏으로 이들의 움직임을 지켜본다. 그러자 곧 카메라의 시야에 부녀와 말이 되돌아오는 모습이 보인다. 좀 이상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카메라는 그들이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윽고 부녀가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가지만, 어찌된 일인지 카메라는 바람을 맞으며 여전히 집 밖, 그 자리에 서 있다. 창문 안쪽에서 밖을 쳐다보는 딸의 얼굴이 마치 유령처럼 일렁인다. 우리는 지난 며칠 동안, 부녀가 창가에 앉아서 습관적으로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는 걸 보았다. 그때 카메라는 무언가를 응시하는 자들의 등 뒤를 응시했고, 이들이 무얼 기다리는지, 무얼 보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이상하게도 창가에 앉은 딸의 시선은 집 밖에서 덩그러니 바람을 맞으며 멈춰 있는 카메라의 시선에 닿아 있는 것 같다. 그녀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바람 속에서 홀로 흔들리는 카메라는 지금 무엇을 위해, 그 자리에 그렇게 버티고 있는 것일까.

어떤 존재증명

다섯쨋날, 카메라는 더이상 움직이기도, 먹기도 거부하는 병든 말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오래 응시한다. 아버지가 말의 고삐를 풀어주고 나가자 딸은 그 말을 한참 바라보다가 마구간을 나서며 문을 잠근다. 그렇게 딸이 떠난 뒤에도 카메라는 문 앞에서 그저 가만히, 마치 문 안쪽의 말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듯, 한동안 머무른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숨겨진 무엇도, 중립적인 관찰자도 아니라, 아버지-딸-말처럼 그 세계 속, 또 하나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만약 누군가가 이 영화를 유물론적이라고 한다면, 다른 의미가 아니라 바로 카메라의 이러한 현존 때문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이 ‘은폐된 드러남’, 이 현존은 도대체 누구 혹은 무엇이며, 그것은 죽어가는 세계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나는 이 질문이 모호하게 남겨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이 영화의 내레이션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이다. 암전된 화면에서 니체와 말의 일화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된 내레이션은 세상의 파멸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남자가 등장하던 둘쨋날과 카메라가 집 밖에서 창가의 딸을 쳐다보는 (위에서 언급한) 넷쨋날, 그리고 여섯쨋날을 제외한 나머지 날들의 끝에 들려온다. 그런데 영화에 등장하는 존재들의 목소리가 아닌, 주인을 알 길 없는 이 외화면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내용이 좀 의아하다. 그것은 누군가의 내면에 대한 설명도 아니고, 충분히 영화적으로 재현 가능하고 그 편이 더 효과적일 순간들- 이를테면 “폭풍은 끊임없이 휘몰아친다. 바람이 만든 거대한 흙먼지만이 거세게 몰아칠 뿐이다”, “우리는 두 부녀가 침대로 가는 소리를 듣는다. 그들의 숨소리도 들린다” 등- 에 대한 묘사다.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는’ 데 몰두하는 타르의 영화가 이런 목소리를 필요로 한 이유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목소리를 영화적 시공간에 대한 문학의 개입으로 본다면, 이 정갈한 (문학적인) 언어는 무섭게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와 무기력하게 반복되는 세계에 묘한 음산함을 더해주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분명 규정적이고 반복적인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의 잉여로 서사 위를 떠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도 아니면서, 거기 불쑥불쑥 개입하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어딘지 권위적인 목소리. 이 목소리는 어떤 의미 때문이 아니라, ‘나는 지금 그 자리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을 과시 혹은 증명하기 위해 거기 존재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비가시적 목소리는 앞서 언급한 카메라의 비가시적 현존, 시선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바꿔 말하고 싶다. <토리노의 말>을 엄밀히 들여다보니 이것은 마부와 그의 말과 딸의 이야기가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그들을 바라보는, 그러나 비가시적인 어떤 현존의 영화다. 그렇다면 그것은 신이 죽은 시대의 새로운 신, 그러니까 카메라, 아니 영화 자신인가? 혹은 마지막 영화를 만들고 있던 벨라 타르 자신인가? 만약 그렇다 해도 이 사실 자체가 영화의 흠으로 작용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좀 다른 데 있다. 최소의 움직임과 대사, 행동, 그러나 극대화된 사운드와 어둠과 빛으로 이루어진 <토리노의 말>은 다시 강조하자면, 세계의 죽음(타르의 말에 따른다면 “반창세기”)의 과정을 영화적으로도 무(無)에 이르는 과정 안에서 보여주는 작품이 되어야 한다. 이때 중요하고도 어려운 과제는 영화적 소멸을 영화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 즉 영화적인 것들이 천천히 사그라지는 과정을 끝끝내 형식의 활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건 카메라가 정지하는지, 움직이는지의 여부와 관련이 없고, 형식의 새로운 고안과 더 관계가 있는 일일 것이다.

죽음의 시간 감각 회복은 성공하지 못했다

모든 인간적인 시간은 죽음으로 이끄는 시간이며, 그걸 영화적인 시간으로 전환할 때, 현대영화는 여러 형식들을 통해 시간 감각을 분쇄해서 죽음의 감각을 상실하게 만든다고 자크 오몽은 말한 적 있다. 그리고 장 콕토는 오래전, “영화, 과정 중인 죽음”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나는 <토리노의 말>을 통해 타르가 시도하려는 바가 죽음의 과정을 형식으로 체현하면서 결국은 이 죽음의 시간 감각을 영화적으로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 형식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건 위에서도 말했듯, 롱테이크의 시간성이기보다는 비가시적 현존으로서의 카메라의 위치와 시선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 영화에 대해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질 때가 되었다. 그 시도는, 형식은, 성공했는가? 적어도 <토리노의 말>에서만큼은 아닌 것 같다.

요컨대 6일에 걸친 부녀의 식사장면을 떠올려보자. 첫쨋날, 식사장면에서 영화는 뜨거운 감자 껍질을 힘겹게 한손으로 까서 먹는 마부의 모습을 지켜본다. 둘쨋날, 똑같은 식사장면에서 카메라는 마부의 등을 걸치고 딸이 먹는 모습을 쳐다본다. 셋쨋날, 이 장면은 창가쪽에서 투숏으로 찍혔고, 마침 집시 무리가 나타나자 마부와 딸은 창문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그리고 다섯쨋날에 이르면, 셋쨋날과는 반대편에서 이들의 식사장면이 투숏으로 찍혔다. 의식적으로 추려낸 하나의 예일 따름이지만, 부녀의 식사장면을 모두 본 다음, 우리는 견고한 형식을 지향하는 이 영화가 빠진 함정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얻게 된다. 한번에 붙여놓지 않았다 뿐이지, 하루하루 카메라의 위치를 옮겨가며 찍은 이 식사장면을 모아놓으니 마주한 두 인물을 담는 가장 전형적인 방식으로 영화에 담겼다. 물론 카메라의 이런 위치 선택이 일반적인 경우처럼 영화의 환영성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이 이 영화의 형식적 욕망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영화 속 세계는 처절하게 부서지고 있는데, 그 세계를 총체적인 세계로 구현하려는 형식적 욕망이 불쑥불쑥 나타나고 있다. 부녀의 식사장면의 경우, 그들은 점차 피폐해져 죽음에 가까워지는데, 영화는 이들의 6일이라는 시간을 완결된 전체, 통합된 시공간으로 보여주려는 욕망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가 세심하게 구별할 것은 형식에 대한 완고함이 영화적 형식의 활력과 동의어는 아니라는 점이다. 애초 이 영화에 기대했던 영화적 소멸의 형상화는 영화가 세계의 기의를, 영화라는 기호를 비워가며, 거기서 어떤 기이하고 설명 불가능한, 또 다른 영화적 활력을 생성하고 뿜어내는 것일 텐데, 여기서 비가시적인 카메라의 현존은 기존의 기의, 규범, 욕망을 붙잡고 지속하고 누적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거기, 어떤 도덕적 감각이 깃들어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사탄탱고>의 저 매혹적이고 장엄한 순간, 영화가 자기만의 방에 고립되어 만취되어가는 늙은 의사의 시간을 보여줄 때, 아무것도 아닌 하잘것없는 움직임과 비좁은 공간이 어느새 괴이한 우주로 확장된 듯한 인상의 감동, 그러나 결국 그가 집 안의 창문을 모두 막아버리고 어둠 속으로 삼켜지는 마지막의 울림, 그러니까 이 묵직한 물성을 <토리노의 말>에서는 찾기 힘들다. 아니, 활활 타오르는 램프의 불빛이 일순간 사라져 어둠 속으로 소멸되는 그 짧은 예고편의 정념과 심상, 소멸의 과정에서도 자신을 불태우며 내뿜는 리듬과 활력의 순간을 정작 영화 내에서는 찾지 못했다.

처음부터 죽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여섯쨋날이다. 잿불도 꺼지고 더이상 마실 물도 없는 어둠 속에서 아버지와 딸이 다시 마주 앉는다. 남자가 한손으로 조리되지 않은 딱딱한 감자를 까서 씹는 소리가 처절하다. 남자는 말한다. “먹어, 먹어야만 해.” 그러나 곧 남자도 먹기를 그만둔다. 부녀는 고개를 숙이고 침묵 속에서 마치 정물처럼 마주 앉아 있다. 아마도 토리노의 말 역시 홀로 마지막 숨을 내쉬며 어둠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이 마지막 날의 의지, 죽음을 눈앞에 둔 생의 위대함, 사라지기 직전 한순간의 굳건함을 보여주는 이 장면을 위해 지난 5일간의 지난한 형식과 어둠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간 우리가 본 건 삶 안에서 치열하게 죽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애초 딱딱하게 굳은 죽음(혹은 죽음의 관념적 형상화)이었던 것 같고, 이 장면은 어쩐지 긴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유령들이 나누는 대화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우리는 진정 죽음의 과정, 영화적 소멸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실은 첫쨋날부터 이곳은 이미 영화적 무덤이 아니었던가. 우리가 이 무덤 속에서 보고 들은 것은 결국 자기 무덤을 관찰하며 자신의 영화적 장례식에 도취된 자의 자의식이 과잉된 응시와 목소리는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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