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진중권의 아이콘] 영상맹의 시대
진중권(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2-03-09

기술적 형상과 그 독해에 관하여

‘기술적 형상’(Techno-bild)이라는 개념이 있다. ‘예술적 형상’이 인간이 손으로 빚어낸 이미지라면, 기술적 형상은 기계로 제작된 이미지다. 최초의 기술적 형상은 물론 19세기에 발명된 사진. 사진술이 보편화한 20세기 초, 이미지의 역사에는 거대한 단절이 생긴다. 19세기까지 이미지를 대표하는 것이 회화였다면, 20세기 이후엔 기술로 제작한 이미지, 즉 사진이 그 역할을 떠맡는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이미지는 이미 사진이다.

해독되는 사진

기술적 형상은 기술의 산물이다. 때문에 모든 기술적 형상은 바탕에 깔린 기술적 텍스트에 대한 ‘독해’를 요구한다. 상상의 산물로 여겨지는 그림과 달리, 사진은 사실의 기록으로 간주된다. 대중 조작의 매체로 사진이 선호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사진도 거짓말을 한다. 그 거짓을 알아차리려면, 기계(카메라)와 기술(촬영술)을 읽어야 한다. 모호이 나지의 말대로 “미래의 문맹자는 글자를 못 읽는 사람이 아니라 영상을 못 읽는 사람이다.” ‘기술적 형상’ 중에는 우리가 찍는 사진과 달리 해당 분야의 전문적 식견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바로 군사나 과학, 혹은 의학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기술적 형상이다. 아마 그 최초의 예 중 하나가 1차대전 당시의 항공사진이리라. 처음에는 사진을 무시했으나, 각 군의 지휘부는 곧 항공사진에 찍힌 병력의 이동 및 배치 상황에서 적의 전략을 읽어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사진술이 지상전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셈이다.

독해의 전문적 식견이 필요한 것은 과학사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천문학자들은 전파 망원경 사진을 보며, 별의 탄생과 죽음, 블랙홀의 존재를 읽어낸다. 생물학자나 화학자나 물리학자들은 전자현미경을 통해 사진에서 물질의 구조와 속성에 대해 일반인이 알 수 없는 정보를 읽어낸다. 대부분의 과학사진은 피사체에서 렌즈로 들어온 반사광을 고정시킨 전통적 사진이라 106기보다는 아주 복잡한 방법으로 우회해서 얻어낸 ‘정보를 시각화’한 것에 가깝다.

오늘날의 기술적 형상은 대부분 전통적 사진과는 전혀 다른 매질로 이미지를 얻는다. 가령 의학사진의 시조인 뢴트겐 촬영은 ‘방사선’으로 제작하는 이미지다. 인체의 횡단면을 보여주는 컴퓨터단층촬영(CT)은 방사선에 컴퓨터를 결합시킨 것이다. 한편 방사선을 쏘이면 안되는 태아의 상태를 확인하는 데에는 ‘초음파’가 사용된다. 최근에 관심을 모았던 자기공명영상(MRI)은 ‘전자기’와 ‘고주파’로 신체부위의 수소원자핵을 공명시켜 얻은 이미지다.

이번 강용석 해프닝에는 두개의 기술적 영상이 존재했다. 하나는 강 의원이 현상금 공모(?)를 통해 얻어낸 박주신의 파파라치 동영상이다. 이 동영상은 “4급이면 저렇게 움직일 수 없다”는 어느 전문의의 소견과 더불어 초기에 의혹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대중의 수준에서도 반박이 가능한 것이었다.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디스크 4급을 받고도 일상생활에 별 지장을 받지 않는 수많은 예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의혹을 확산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시 MRI 사진이었다. 사진이 공개되자 먼저 인터넷의 의사들 커뮤니티에서 술렁임이 일었고, 곧이어 ‘나영이 주치의’로 알려진 세브란스 병원의 한 의사가 사진 속의 인물은 결코 박주신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어서 ‘전국의사총연합’이라는 단체에서 공식적으로 강용석 의원이 공개한 사진에 대한 독해를 발표했다. 사진 속의 인물은 호리호리한 몸매의 박주신일 리 없다는 것이었다.

전국의사총연합의 진단에 따르면, 사진 속의 인물은 적어도 체중 90~100kg의 고도비만 환자이며, 척추 뼈의 상태로 보아 20대가 아니라 30~40대의 신체라고 한다. 디스크의 상태는 병역면제에 해당하는 5급에 가까운 상태로, 환자가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든 상태라는 것이다. 이 진단에는 파파라치 동영상도 알게 모르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적어도 그 동영상 속의 청년은 호리호리한 몸매에 계단을 오르내리는 데에 별 지장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부정할 수 없는 MRI의 존재. 반박할 수 없는 전문가의 독해. 결국 재검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밝혀진 것은 이른바 ‘전문가’들의 독해가 틀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박주신의 체중을 63kg로 추정하고, 피하지방층의 두께를 4cm라 측정했으나, 그 청년의 체중은 실제로는 80kg, 피하지방층의 두께는 3cm로 나타났다. 한마디로, 굳이 ‘특이체질’이라고 하기 힘든,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케이스였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프레임의 문제

이른바 ‘전문가’들이 당시에 미리 살펴야 할 가능성은 둘이었다. (1) 사진이 조작됐거나, (2) 독해가 잘못됐다. 사진조작은 강용석이 같은 날 촬영된 MRI 사진들을 시리즈로 공개함으로써 희박한 가능성이 됐다. 남은 것은 오독의 가능성이다. 사실 사진에서 곧바로 독해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독해는 ‘해석의 프레임’ 속에서만 가능하다. 문제는 종종 그 프레임이 반성되지 않고 그냥 전제된다는 데에 있다. 논리적으로는 ‘부당전제의 오류’라 해야 할까?

그들의 프레임 속에서 박주신은 신장 176cm에 체중 63kg의 신체를 갖고 있었다. 파파라치 동영상은 이 선입견을 확인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청년의 신체는 호리호리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깟 파파라치 동영상으로 두꺼운 겨울외투 속에 감춰진 신체의 속사정을 알 수는 없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재 박주신의 체형을 미리 확인하지 않았다. 지방층 4cm에 90~100kg로 추정했다면 지방층 3cm에 80kg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잖은가.

전문가라면, 현재의 체중을 확인한 다음에 독해에 들어갔어야 한다. 나아가 상대에게 의혹을 제기할 경우에는 일단 ‘호의의 원칙’에 따라 최대한 박주신에게 유리하게 해독을 한 다음에, 그래도 남는 부분을 지적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현재의 체중을 확인하지 않았고, 독해도 ‘악의의 원칙’에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피하지방층 4cm.” 이 두 가지 오류가 합쳐져 결국 MRI 판독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던 것이다. “박주신의 것일 리 없다.” 이런 식의 독해는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정치적’인 것이다. 그들의 오류는 결국 사진을 자신들이 읽고 싶어 하는 대로 읽은 데에서 빚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사진을 독해하는 데에 알게 모르게 정치적, 이념적 편견을 작동시켰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사진 속에서 박주신의 신체를 읽은 게 아니라 자신들의 은밀한 정치적 소망을 읽은 셈이다. 듣자하니 전국의사총연합의 대표는 이른바 ‘정치의사’라 불리는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라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선거기간 동안에 이미 ‘병역비리’라 공격을 받은 사람이 그 엄중한 사회적 감시망을 뚫고 병역비리를 저지르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박주신의 병역비리가 사실이려면, 너무나 많은 비개연적인 가정이 필요하다. 일단 자생병원-혜민병원-병무청 의사가 범행에 가담해야 한다. 그러려면 배후에 병역브로커가 있어야 한다. 병무청의 공식해명 이후에는 병무청 고위층까지 범행은폐에 가담했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 정도의 추론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누구나 했어야 하는 것. 하지만 누구도 이 상식적 물음을 던지지 않았다. 그 결과 대중은 물론이고 전문가까지 졸지에 영상맹이 되어버린 것이다. 전문가주의의 오류랄까? 기술적 형상을 읽는 것이 전문가만의 특권이라 말하지 말라. 그것은 사회에 책임이 있는 모든 시민의 과제이자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