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첫사랑의 신화에 대한 영화 <건축학개론>
주성철 2012-03-21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은 ‘첫사랑의 신화’를 가장 지독한 성장통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열여섯살 소년 블라디미르는 언제나 많은 남자들에 둘러싸여 있던 5살 연상의 지나이다와 어렵사리 가까워지고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신의 아버지와 은밀한 관계였다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한없이 도도했던 그녀가 아버지에게는 그렇게 연약할 수 없다는 사실에 또다시 괴로워한다. <건축학개론>의 첫사랑이 <첫사랑>만큼이나 고통에 몸서리치는 정도는 아니지만 불현듯 찾아온 첫사랑의 불가항력적인 힘, 그리고 그 우연과 찰나의 첫 순간이 어떻게 이후 그 사람의 남은 인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치밀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은근히 겹친다. <건축학개론> 역시 변치 않는, 아니 사실은 ‘나는 변했지만 너만은 변치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첫사랑의 신화에 대한 영화다.

건축학과 신입생 승민(이제훈)은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난 음대생 서연(수지)에게 반한다. 둘 다 같은 버스를 타고 다니며 정릉에 산다는 것을 알고 둘은 함께 만나 숙제를 하게 되면서 차츰 마음을 열고 친해진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툰 순진한 승민은 고백하기 직전, 자신의 같은 과 선배이자 서연의 방송반 선배를 둘러싼 오해로 서연과 멀어지게 된다. 그로부터 15년 뒤, 건축가가 된 승민(엄태웅) 앞에 서연(한가인)이 불쑥 나타난다. 당황스러운 승민에게 서연은 제주도에 자신을 위한 집을 설계해달라고 한다. 그렇게 승민은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작품으로 서연의 집을 짓게 된다. 하지만 그로 인해 결혼식 준비에 소홀한 그를 보고 약혼녀 은채(고준희)는 못마땅해한다. 그렇게 집이 완성돼나가는 동안 두 사람 사이의 오랜 사랑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먼저 <건축학개론>은 90년대 학번들에게 보다 제대로 꽂히는 영화다. ‘제우스’ 티셔츠를 ‘게스’ 티셔츠로 알고 애지중지하고, 허리에 ‘삐삐’를 차고는 헤어 무스로 ‘올백’ 머리를 만들며, 이어폰을 하나씩 귀에 나눠 꽂은 채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듣는다. 슬그머니 웃음 짓게 만드는 그런 추억으로의 여행은 아버지와 아들 단둘이 살던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릉 버전처럼 엄마와 아들이 함께하는 낡은 집의 정서로 다가온다. 그런 추억들과 함께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이라는 ‘기억의 습작’을 우리 인생에서 영영 떨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만든다. 현재와는 다른 승민과 서연의 첫사랑을 온전히 따로 선명하게 남겨두기 위한 장치랄까. 얼핏 닮아 보이지 않는 네 배우를 마치 억지로 15년차로 분리시킨 이유는 그것이었을 거다. 집이 완성돼가는 동안 과거와 현재의 대화는 그렇게 끊임없이 대화한다.

승민은 선배 집에 있는 신형 펜티엄 컴퓨터를 보고는 “(하드 저장용량이) 1기가면 평생을 써도 다 못 쓰겠다”고 했지만, 세상은 너무 빨리 변했다. 첫사랑의 기억도 그런 기술의 발전처럼 쉽게 변하고 잊혀져갔다. 첫사랑이 애틋한 것은 대부분 실패의 기록이거나 시작하지도 못한 사랑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민이 은채에게 첫사랑을 묘사하며 내뱉었던 ‘썅년’이라는 말이 현재의 사랑을 안심시키는 말임과 동시에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서연 역시 이혼한 남편과도 처음에는 진정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과거의 물건과 흔적들을 쉼없이 끄집어내며 첫사랑의 기억을 복기한다. 하지만 승민이 실연의 고통으로 홧김에 걷어찼던 대문을 15년이 지나 펴서 고칠 순 있어도 이미 변해버린 감정과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투르게네프가 같은 소설에서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제 남은 것은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내 자신을 비방하는 것뿐”이라고 했던 것처럼 <건축학개론>의 서연과 승민도 오해로 빚어진 그 죄책감을 15년 동안 안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얘기지만, 아니 이미 그것을 각오하고 감정이입한 사람들에게 <건축학개론>은 옛 기억에 스스로를 비방하며 살아온 사람들을 위로하는 영화다. 집을 지어나가는 과정은 그 오해를 풀고 지난 죄책감을 씻는 행위다. ‘기억은 저마다 한채씩의 집을 짓는다’는 고 최명희 소설가의 글처럼 영화 속 ‘집’과 ‘사랑’은 그렇게 하나로 이어진다. “이 집이 지겹지도 않아?”라는 승민의 물음에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집이 지겨운 게 어딨어. 집은 그냥 집이지.”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