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design+
[design+] 팬텀 오리온과 리버시브 투칸

<아저씨>의 학교 앞 문방구 풍경

한 소년이 진열대 위에 놓인 물건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다시 되돌린다. 그의 시선이 가닿는 곳마다 오싹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장 학교 정문 앞에 하나 남은 ‘문화’문방구로 달려왔다.

주말 내내 그는 자신이 짜놓은 계획에 따라 낮잠에 취해 있던 아빠를 상대로 공작을 펼쳤고, 마침내 오늘 아침 식탁 앞에서 용돈을 받아냈다. 엄마는 송곳 같은 눈초리로 아빠를 쏘아보며 “아이 버릇 나빠진다”고 말했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된 상태였다. 어제 저녁, 아빠는 소년에게 항복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소년의 치밀한 전략 앞에서 엄마의 잔소리는 그저 승전보를 알리는 전령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 하루, 기나긴 수업 시간을 인내하며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렸다. 이번주 교실에서 그가 앉은 자리는 다행히도 창가쪽이었다. 수업 시간 틈틈이 선생님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운동장을 향해 눈길을 돌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거대한 팽이가 그곳에서 모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거침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환각 속의 주인공은 <메탈베이블레이드>의 ‘팬텀 오리온’이었다. 베어링을 내장한 ‘버텀’으로 지면과의 마찰력을 최소화해 극강의 지구력을 자랑하는, 출시되자마자 아이들 사이에서 레전드가 된 팽이였다. 팬텀 오리온보다 강한 공격력을 갖춘 팽이들은 많았지만 온갖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고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버티는 팽이는 팬텀 오리온밖에 없었다. 소년은 수차례 패배의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전까지 그가 가장 아끼던 팽이는 ‘바셀트 호로지움’이었다. 뭉툭한 원형의 모양새 때문에 그리 인기가 높지 않았지만 묵직한 은색의 금속 휠은 놀라운 파괴력으로 상대 팽이를 압도했다. 하지만 지금은 바야흐로 4D 팽이의 세상이었고, 팬텀 오리온의 독무대였다. 비밀리에 진행된 세대교체의 결과였다.

헐,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금요일 오후까지만 해도 진열대에 있던 팬텀 오리온이 모두 사라지고 없다. 디아블로 네메시스, 사이즈 크로노스, 엘드라고 디스트로이 등 악당 같은 이름의 팽이들만이 은빛의 근육질 메탈 프레임을 자랑하며 야멸찬 눈매의 ‘페이스’를 치켜들고선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팬텀 오리온은 다 팔려나간 모양이다. 이 일을 어쩌지? 눈 딱 감고, 하나 남은 빅뱅 페가시스를 살 것인가? 아니면 옆 동네로 문방구 순례를 떠날 것인가?

소년은 시름에 빠진 채 고민 중이다. 그런데 누군가 문방구의 문을 열고 들어온다. 고개를 돌려보니 얼마 전에 소년의 반으로 전학 온, 유난히 눈동자가 커서 마치 검은 눈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소년을 못 본 척하고 스윽 지나치더니 이내 그의 바로 옆에 선다. 그리고 팽이 옆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앵그리버드 인형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그녀의 시선은 부리가 큰 ‘리버시브 투칸’에 고정되어 있다. 소년은 호주머니 안의 지폐를 만지작거리면서 이번에는 기꺼운 마음으로 고민에 잠긴다. 팬텀 오리온도 없는데, 차라리 그녀에게 새 인형을 선물로 사주는 것은 어떨까? 지금 소년은 그녀를 열심히 곁눈질하고 있는 중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