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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96학번 그리고 ‘매운탕’ 같은 인생

<건축학개론>에서 건축학도와 음대생이 만났을 때

1996년, 그 시절 ‘문화’의 수심은 꽤 깊어진 상태였다. 88올림픽 이후 경제 호황의 물줄기를 따라 온갖 잡동사니들이 흘러든 덕분이었다. 왕가위와 쿤데라와 서태지와 하루키와 <키노>와 PC통신과 심은하와 윤상이 생산지와 유통기한을 가리지 않고 그곳으로 흘러들어와 한데 뒤섞여 있었다. 누구든 한번 빠져들면 꽤 오랜 시간 허우적거리며 자신만의 쾌락을 발명해낼 수 있을 만큼의 깊이였다. 90년대식 낙관주의가 이념의 강박이 사라진 대학가를 점령하고 있었다. 정릉 거주 건축학과 남학생과 제주도 출신 음대 여학생은 바로 이 시점에 신촌에 도착했다. 그들이 입학식을 치른 뒤 <저수지의 개들>이 상영되었고, 두달 뒤에는 건축학개론 교수가 삼류 소설가 역을 맡아 출연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개봉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 따위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었다. 그들은 사춘기부터 자연스럽게 소비를 통해 문화와의 접촉면을 넓히며 취향을 연마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정릉시장의 순대국밥집은 지나치게 곤궁했고, 제주도의 바닷가 마을은 너무 외졌다. 그들의 부모는 그러니까, 그 시절 흔하디흔했던 중산층이 아니었던 것이다. 첫 학기 내내 그들은 낙폭이 큰 문화적 격차를 경험하며 아찔한 현기증에 시달려야 했다. 여학생은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만난 남학생이 자신과 동류라는 걸 눈치챘다. 서울 지도 위에 겹쳐진 그들의 빨간색 동선이 그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90년대 대학 캠퍼스에서 ‘신세대’로 살아가려면 타인의 응시 속에서 청춘의 자아를 능숙하게 연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들은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남학생은 짝퉁 게스 티셔츠가 창피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을 정도로 둔감했다. 반면, 여학생은 소니디스크맨의 이어폰에 의지해 친구 하나 없는 낯선 도시로부터 자신을 고립시켰다. 개인 레슨도 받지 않고 명문 음대에 입학한 제주도의 피아노 영재가 ‘학원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등 뒤에 붙인 채 자포자기의 상태에 도달하는 데 딱 한 학기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황폐해진 마음의 풍경을 다시 추스르는 것뿐이었다. 폐가 직전의 개량 한옥을 드나들며 자신만의 안식처를 꾸며보기도 했고, 개포동의 빌딩 옥상에 올라가 음대 동기생들이 살고 있을 법한 강남의 콘크리트 숲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계층 상승의 세속적인 욕망이 스멀거리는 걸 억누르기엔 힘이 부쳤지만, 그래도 세상 때가 덜 탄 남학생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반면 남학생은 재수생 친구의 족집게 연기 지도에도 불구하고 첫 연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해 아등바등이었다. 여학생의 속사정을 눈치채지 못한 초심자의 눈에, 그녀는 그저 예쁜, 수수께끼 같은 상대역일 뿐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풋사랑이 몇번의 엇갈림 속에 이별의 수순을 밟게 되리라는 건 누구라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의 불행은 오히려, 다른 곳에 있었다. 재회의 시간이 너무 늦게 찾아왔다는 것이다. 19살의 그들이 꿈꾸었던 미래가 IMF 외환위기를 통과하며 15년에 걸쳐 산산조각난 뒤, 그들은 열패감에 찌든 얼굴로 서로 마주 대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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