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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기계를 닮은 인간 또는 인간을 닮은 기계

우스움과 섬뜩함

우연히 30여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손에 집어들었다. 앙리 베르그송의 <웃음-희극성의 의미에 관한 시론>이다. 이 책은 대표적 희극에 등장하는 우스운 장면들을 분석하여 희극성의 본질을 추출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 그는 “희극적인 것은 생명적인 것에 끼어든 기계적인 것”이라는 결론을 얻어낸다. 이 관점의 바탕에는 물론 베르그송 특유의 생철학의 시각이 깔려 있다. 한마디로 희극성이란 생명이 기계로 전락한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표정의 희극성

이는 ‘형태’와 ‘동작’ 모두에서 발견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희극적 얼굴이란 “얼굴의 일상적 유연성 속에 어떤 굳어진 것, 응고된 것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얼마 전 개그맨 남희석씨를 학교로 초청하여 강연을 들은 적 있다. 청중 앞에서 그는 정상적인 얼굴로는 도저히 흉내를 낼 수 없을 정도의 기형적 표정들을 지어냈다. 듣자 하니 그 표정들을 얻어내기 위해 아예 하회탈을 가져다놓고 연습을 거듭했다고 한다.

캐리커처는 어떤가? 아무리 정상적인 얼굴이라도 균형이 절대적으로 완전한 것은 아니어서, 약간의 기형성은 들어 있게 마련이다. 캐리커처는 감추어진 이 사소한 일탈을 포착하여 과장함으로써 남의 눈에 잘 띄게 만든다. 이른바 ‘연예인 굴욕사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얼굴의 움직이는 표정 중의 어느 순간은 그로테스크하게 보이게 마련. 보이지 않게 스쳐 지나가는 이 순간을 캡처하여 응고시킬 때, 그 아름다운 스타의 얼굴도 졸지에 우스워진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영혼은 신체에 생명의 약동(elan vital)을 부여한다. 신체가 물질임에도 ‘우아함’을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캐리커처는 얼굴의 생동성을 왜곡된 형태로 응고시킨다. 우스운 것은 물질의 저항이다. “물질이 영혼의 생명성을 외형적으로 둔화시키고, 그 운동성을 고정시켜 결국 영혼의 우아함을 성공적으로 저지하게 되면 신체에서 희극적 효과를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희극성’은 우아함에 반대되며, ‘추함’보다는 경직성에 가깝다.

동작의 희극성

표정에 이어 베르그송은 동작의 우스꽝스러움에 대해 얘기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신체의 태도나 몸짓, 동작은 우리에게 단순히 기계적인 것을 연상시키는 정도에 정비례하여 우스꽝스러워진다”. 대표적인 예가 기계적 반복이리라. 사실 희극에서 대부분의 효과는 동작의 기계적 반복을 통해 얻어진다. 가령 사오정 농담을 생각해보라.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밥 먹는다.” “무슨 반찬?” “밥 먹는다.” “죽었니, 살았니?” “밥 먹는다.”

흥미로운 것은 파스칼의 언급이다. “서로 닮은 두 얼굴은 따로 떼어놓고 보면 특별히 우습지 않은데, 함께 있으면 그 유사성으로 인해 웃음을 자아낸다.” 실제로 그 자체로서는 매우 잘생긴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닮은 다른 얼굴의 존재로 인해 우스워지는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가령 혼자 있을 때는 ‘조각미남’이라 불리는 내 얼굴도 가수 윤종신씨의 얼굴과 연관되는 순간 졸지에 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성대모사도 마찬가지다. 사적인 모임에서 개그맨 남희석씨가 다른 연예인들의 흉내를 내는 것을 보았다. 그가 전유성씨가 최양락씨를 흉내낼 때면 정말 그 자리에 그들을 데려다놓은 느낌이었다. 좌중은 물론 뒤집어졌다. 똑같다고 경탄하자, 그가 겸손하게 말하기를, “에이, 개그맨들은 누구나 다 이 정도는 해요”. 그저 흉내만 냈을 뿐인데, 왜 그게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베르그송에 따르면 “생명에는 반복이 없기 때문”이란다.

그로테스크

<웃음>의 1장을 읽다가, 우연히 베르그송의 이론과 모리 마사히로의 ‘언캐니 밸리’ 이론이 데칼코마니처럼 서로 대칭을 이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모리 교수의 이론에 따르면 기계는 인간을 닮을수록 호감을 주나, 기계가 지나치게 인간을 닮으면 불현듯 ‘섬뜩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반면, 베르그송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지나치게 기계를 닮으면 졸지에 ‘우습게’ 느껴진다. 한마디로 인간 같은 기계는 섬뜩하나, 기계 같은 인간은 우습다.

섬뜩함과 우스움. 둘은 서로 대립되는 듯하지만 중세와 르네상스까지만 해도 이 두 감정은 ‘그로테스크’(grotesque)라는 하나의 범주 안에 묶여 있었다. 가령 중세 무아삭 수도원의 기둥에 조각된 기괴한 괴물들, 그리고 히에로니무스 보시의 그림에 묘사된 괴상한 형상들을 생각해보라. 그것들은 무시무시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희극성’이라는 근대적 감성은 ‘섬뜩함’과 함께 그로테스크라는 공통의 혼합감정에서 분화되어 나온 것이다.

인간이 마치 생명력을 잃은 듯 경직된 기계적 동작을 반복할 때 우리는 웃게 된다. 이게 희극적 상황을 만들어내는 대표적 모티브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희극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꽤 심각한 정치적 맥락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때도 있다. 언젠가 심상정 의원에게 듣자 하니, 말이 잘 통하던 민주당 의원들이 갑자기 고장난 녹음기처럼 같은 소리를 반복할 때가 있다고 한다. 그때는 “아, 삼성에서 다녀갔구나”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고.

아이돌에서 척키로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이른바 ‘NL’이라 불리는 세력의 경직성이다. ‘민족민주혁명을 통해 미제를 몰아내고,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여, 북한과 연방제 통일을 한 뒤, 그 지도하에 함께 사회주의로 이행한다.’ 이 전략은 북한 체제가 여러 면에서 남한보다 우위에 있었던 1960년대라면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변화한 상황 속에서도 이런 이념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베르그송의 관점에서 볼 때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른바 ‘당권파’의 김선동 의원은 독특한 방식으로 NL의 기계적 경직성을 드러내어 우리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투표함에서 절취선이 잘려나가지 않은 무더기 표가 발견되자, 그는 “마른 풀의 접착력이 다시 살아나 들러붙었을 뿐”이라 변명했다. 형상기억 투표용지도 있는 모양이다. 이런 수준의 변명은 사람이 아니라 기계의 언어로 느껴진다. 뇌 속에 80년대에 세탁기나 냉장고에 사용되던 초보적 수준의 인공지능을 장착한 기계랄까?

똑같은 경직성을 보였지만, 이정희 대표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은 사뭇 달랐다. 그것은 우스꽝스러움보다는 충격과 경악에 가까웠다. 왜 그랬을까? 한때 그녀가 ‘진보의 아이돌’로 여겨졌던 것은, 그녀가 80년대 운동권 특유의 경직성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녀에게서 ‘자유의지’에 따라 활동하는 생동적인 개인을 보았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그녀는 자신이 특정 정파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서비스 로봇임을 스스로 폭로했다.

김선동 의원의 경우 ‘기계를 닮은 인간’으로 전락했기에 우스꽝스러운 반면, 이정희 대표의 경우에는 ‘인간을 닮은 기계’로 드러났기에 섬뜩한 느낌을 준다. 대중이 이정희 대표의 표변에서 받은 충격은 한마디로 인간적 포장과 기계적 본질의 괴리에서 비롯된다. 허상(‘생동적인 민주주의적 개인’)과 실체(‘경직된 전체주의적 맹원’)의 괴리. 충격을 받은 네티즌은 이정희 대표를 ‘척키’라 부르나 보다. 인간처럼 움직이는 인형은 섬뜩하다.

‘우스움’과 ‘섬뜩함’은 시대착오적 이념을 반복하는 기계적 경직성의 두 효과다. 두 효과는 하나로 합쳐져 그로테스크를 이룬다.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