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디스토피아로부터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누가 영화제를 망치는가
이송희일(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이선용(일러스트레이션) 2012-06-25

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평론가들의 무덤이 되려나 보다. 1회 정성일, 김소영부터 얼마 전 해임된 유운성까지 유수의 프로그래머들이 전주에서 추방당했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6월5일, 유운성 프로그래머가 해임 통보를 받았다. 유운성에 따르면 전주지역 언론들이 이사회를 압박해 내린 결정이란다. 이에 대해 유운성은 기자회견장에서 “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도 트는 축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영화제”라고 이야기했는데, 지역 신문 기자가 “영화제가 영화만 틀면 됐지”라고 기사를 실었다고 토로했다.

무엇이 진실이든, 영화제가 영화가 중심이 되는 축제면 됐지, 다른 그 무엇이기를 바라는지 그 속내가 의뭉스럽기 짝이 없다. 덕분에 로카르노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비롯한 세계 영화인들이 협력 중단을 선언했고, 전주국제영화제 스탭 16명이 해임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내는 등 파국의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전주 언론들은 올해 영화제 기간 내내 불만을 토로했다. 전주영화제가 다른 지역의 요란한 축제를 모방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불만의 핵심. 또한 지역민들에게 생색낼 수 있는 유명 스타가 내려오지도 않고, 대중영화를 상영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운영비로 알차게 새로운 영화를 발굴하고, 한국영화계에 미학적 젖줄을 제공하는 게 그렇게 못마땅했나 보다.

하기는 지역 언론은 지역 관료와 토착 세력의 입장을 반영할 뿐이다. 싸고 저렴한 볼거리의 관변 축제를 통해 실적을 올려야 하는 지역 관료 입장에서 예술-독립영화만 상영하는 영화제가 고와 보일 리 있겠는가. 영화제에 틈새시장이라는 빨대를 꽂아 단물 좀 뽑아먹어야 하는 지역의 유지 나리들 눈에 아방가르드 영화 미학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전주영화제이니 전주 시민들이 즐겨야 한다고? 맞는 말이다. 그러려면 애초에 디지털영화와 독립영화를 표방하지 말고, 그에 걸맞은 계획을 세웠어야 했다. 장기적 계획의 부재를 프로그래밍 탓으로 돌리려니 이렇게 탈이 난다.

이게 다 한국판 문화 토건주의. 영화제를 영화제로 사유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이익으로 환산하려는 한국의 속물주의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년 지역 분권화라는 미명하에 경쟁하듯 난립하다 부동산 거품처럼 사라진 그 수많은 지역 축제들을 보라. 지금도 어딘가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조잡한 지역 축제들과, 또 어딘가에서 돈이 안된다며 가차없이 사라지고 있는 축제들 말이다.

시간을 견뎌내는 전통과 문화에는 도통 관심없는 저렴한 성과주의가 이렇게 지역 문화를 잠식하고 있다. 지역 토착 세력들이 영화제를 한낱 장신구로 여기고,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을 치어걸로 여기는 한 영화제의 미래는 없다. 광주영화제, 부천영화제, 이제는 전주영화제, 자, 다음은 어디인가?

슬픈 일이다. 아니, 대체 영화제가 영화들을 잘 틀면 됐지 뭘 하기를 바라는가. 국내 어느 영화제보다 영화학도들이 앞서 달려가 배움의 길을 트고, 다른 지역의 눈 밝은 관객이 전주 아니면 그 영화를 볼 수 없다며 새벽행 기차를 마다지 않았던 그 소중한 영화제가 지역 토착 세력의 이기적 욕망에 그 지반부터 흔들리고 있다. 마침내 위기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