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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저스틴, 이것은 당신을 위한 종말입니다
신형철 2012-07-18

라스 폰 트리에는 왜 <멜랑콜리아>를 두개의 장으로 나눴는가?

리들리 스콧의 <프로메테우스>와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를 각각 ‘기원의 서사’와 ‘종말의 서사’로 명명하고 두 영화를 함께 읽어보겠다는 것이 애초의 계획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잉태되는 성스러운 순간에 참여할 수 없고, 죽은 뒤의 세상에 미리 입회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들이 주는 불안을 견뎌내기 위해 이야기라는 것을 만들어왔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탄생’과 ‘죽음’은 이 세상 모든 이야기들의 어쩔 수 없는 두 뿌리다. 그것이 인류와 우주의 층위로 확대되면 바로 ‘기원’과 ‘종말’의 서사가 구축될 것이다. 이를 감히 ‘서사의 서사’라 칭해도 될까. 당대의 거장들이 바로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해서 나는 긴장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를 보고 나서는 애초의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프로메테우스>는 ‘기원의 서사’라는 명칭에 힘있게 부응하는 작품이 아니었다. 이 영화의 기술적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를 평가할 식견이 내게는 없다. 영화 장인의 위대한 걸작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사론(narratology)의 시야에서 볼 때 이 영화가 ‘문제와 해결’을 설정하는 방식은 의외로 관습적이었다. ‘문제’의 근원을 거대기업 소유주의 탐욕으로 설정하고, ‘해결’의 방법을 선량한 인간들의 숭고한 자기희생에서 찾는 발상은 맥이 풀리는 클리셰에 가깝다. 관습적인 설정들을 구원해줄 예외적인 캐릭터도 찾기 어려웠다. 힘을 실은 대사들이 더러 있었지만 심오한 질문은 서사 전체가 던지는 것이지 주인공의 대사 한두 마디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멜랑콜리아>는 달랐다. 어떤 물음이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설사 이것이 속임수라 하더라도 기꺼이 속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줄거리는 이렇게 짧게 정리될 수도 있다. 멜랑콜릭으로 분류될 만한 증상이 있는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이 부조리한 행동들로 자신의 결혼식을 엉망으로 만든다(1부). 얼마 뒤 멜랑콜리아라는 이름의 행성이 지구와 충돌해 지구가 멸망한다(2부). 말하자면 임상적 범주로서의 멜랑콜리아와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행성 멜랑콜리아가 차례로 등장하는 이야기다. 억지를 좀 부린다면, 별개의 두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왜 붙어 있는가. 내게는 이런 물음이 남았다. ‘우울을 얘기하기 위해 종말을 끌어들인 것인가, 종말을 얘기하기 위해 우울을 전제한 것인가?’

저스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부가 보여주는 저스틴의 모습은 관객을 고통스럽게 한다. 결혼식을 치르는 날인데, 그녀는 마치 몇겹의 감옥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두렵고 고통스럽다. 그 자신도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으니 더욱 끔찍하다. 언니 클레어(샬롯 갱스부 르)에게 토로한 대로 그녀는 “간신히 버티고” 있다. 결혼식 도중에 조카 옆에서 잠을 자고, 드레스를 입은 채로 목욕을 하며, 결혼식장 바깥 골프장에서 오줌을 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장면은, 흔히 결혼식의 관습적 귀결로 간주되는 남편과의 초야를 유예한 그녀가, 직장 동료인 팀과 돌발적인 섹스를 감행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녀는 왜 이런 행동을 하는가. 그녀가 그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우리가 그녀를 이해하는 일이 가능할까?

이쯤에서 나는 그녀를 이해하는 가장 손쉬운 관점 하나를 우선 기각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2부까지 본 뒤에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가능하다. 그녀는 지구의 종말을 이미 예측하고 있지 않았는가, 그런 와중에 결혼식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었겠으며 과연 상식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겠는가, 라는 생각 말이다. 즉 1부의 우울은 2부의 종말에 미리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1부가 1시간 동안 재현하는 저스틴의 고통에 거의 감응하지 못한 관객에게만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왜 모든 것을 견딜 수 없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또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잘해내려고 애썼기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그녀가 곧 닥쳐올 종말 때문에 현재를 허망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라면, 그녀에게 무슨 고통이 있었을 것이며 무엇을 위한 의지가 필요했을 것인가.

이렇게도 반박할 수 있다. 저스틴의 태도를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도 결국은 “가끔 네가 죽도록 미워!”라고 말하고 마는 언니 클레어의 양가적인 태도, 이는 동생의 그런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언니만이 보일 수 있는 태도이며, 이를 통해 보건대 저스틴의 우울은 그 연원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는 것. 게다가 저스틴이 별자리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장면이 두어번 나오지만, 그녀 역시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다기보다는 다소 예민한 호기심을 보이는 정도에 머문다는 것. 그러니 이 영화의 1부는 그 자체로 충분히 숙고할 가치가 있는 ‘우울의 서사’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다시, 그녀를 이해하는 일은 가능할까? 다행히 우리에게는 이 우울의 문을 열 수 있는 몇개의 열쇠가 있다.

그 첫 번째 열쇠는 당연하게도 프로이트의 논문 <애도와 우울>(1917, 국역본 제목은 <슬픔과 우울증>)에서 찾을 수 있다. 일단은 애도(mourning)와 우울(melancholy)은 둘 다 사랑한 대상을 상실했을 때 주체가 보이는 반응이다. 애도가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그 대상에 쏟았던 에너지(리비도)를 철회하여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라면(그래서 ‘애도 작업’이나 ‘애도 기간’ 같은 말이 성립될 수 있다), 우울은 대상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그 대상과 동일시하면서 자기 파괴적인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경우다(그래서 애도와 달리 우울은 병리적인 현상이며 치료의 대상이 된다). 세부 논증은 생략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우울의 경우 ‘상실’과 ‘자학’이 맺고 있는 이 기묘한 관계는 섬세한 해석의 대상이 돼야 마땅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자들은 오늘날 제도적인 정신의학이 우울(melancholy)을 우울증(depression)이라는 명칭으로 진단하고 약물치료에 의존하는 데 회의적이다. 라캉학파 분석가인 대리언 리더는 말한다. “인간 내면을 탐구하는 일이 정신 위생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대체되고 있다.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제거하는 것이다. 우울증을 바라보는 이러한 시선이 문제 자체의 일부분은 아닐까?”(<우리는 왜 우울할까>) 누구의 방식이 올바른가를 따지는 게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라스 폰 트리에가 ‘멜랑콜리아’라는 제목의 이 영화에서 저스틴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울’을 어떤 시각에서 재현하고 있는가, 우리가 어떤 관점을 택할 때 이 텍스트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일이다.

저스틴의 증상을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의 우울, 즉 상실과 자학의 불행한 상호작용 사례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상실한 대상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여기서 물어볼 만한 질문. 왜 저스틴의 우울은 하필 결혼식을 배경으로 재현되는가. 동성끼리의 결혼이 금지된 사회에서 결혼식은 이성애적 정체성을 공적으로 선언하고 확인받는 의식이다. <젠더 트러블>(1990)에서 주디스 버틀러는 유아기에 우리가 최초로 맞닥뜨리는 금기는 근친상간 금기가 아니라 동성애 금기라고 말한다. 동성 부모라는 ‘사랑의 대상’을 ‘상실’해야만 정상적(=억압적)으로 형성되는 우리의 이성애적 젠더 정체성은 그래서 ‘본질적으로 우울증적’이라는 것이 그의 논변이다. 이것이 우리가 쥘 수 있는 두 번째 열쇠다.

반드시 위의 논변과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어쩌면 저스틴은 자신의 ‘여자-임’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는 일에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추정에 근거가 없지는 않다. 1부의 도입부는 신혼부부를 태운 긴 리무진이 좁은 시골길을 통과하지 못해 애를 먹는 상황, 그래서 남편과 아내가 번갈아 운전대를 잡는 모습을 이상한 불안감 속에서 보여준다. 이 장면이 그날 밤의 성관계가 곤란에 봉착할 것임을 암시한다는 것은 굳이 지적하기도 멋쩍다. 저스틴의 부모는 그녀가 겪고 있는 모종의 곤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안 한다. 어머니는 결혼식을 혐오한다는 말로 딸의 ‘여자-됨’의 시간을 조롱하고, 아버지는 딸에게 남긴 쪽지에서 딸을 ‘저스틴’이 아니라 ‘베티’(두 하객의 이름)라고 잘못 호명하기까지 하는 부주의한 무기력을 보여준다.

알레고리로서의 멜랑콜리아

그러나 이런 해석이 이 텍스트를 더 두껍게 만드는 것 같지는 않다. 저스틴의 멜랑콜리아를 임상적 사례나 정체성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더 큰 범주의 의미를 함의하는 알레고리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이것이 우리의 세 번째 열쇠다. 멜랑콜리아에 대한 연구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학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의 체액설은 인간을 네 유형으로 분류하는데, 그들은 그중 ‘흑담즙’이 지배하는 우울한 체질을 멜랑콜리아라 명명했다. 이후 이 학설은 점성술과 결합하였고, 각각의 체질은 그것에 영향을 준다고 간주되는 행성들과 짝을 맺게 되는데, 멜랑콜리아는 토성(Saturn)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규정됐다. 이후 멜랑콜릭들은 병리적인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저 예외적인 우울함 속에서 세계의 이면을 투시하는 특별한 존재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저스틴을 하나의 알레고리로 본다는 것은 멜랑콜리아에 적재되어온 의미, 즉 ‘신비로운 반사회성의 소유자’ 혹은 ‘진실의 예외적 투시자’라는 의미를 그녀가 대리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같은 말을 더 사회학적인 방식으로 말하면 이렇다. “근대가 창출한 사회적 모더니티가 국민국가, 자본주의 그리고 시민사회를 축으로 하는 공적 제도의 영역에서, 베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Geist) 없는 전문가’와 ‘가슴 없는 향락자’들을 양산했다면 사회적 모더니티의 지배적 가치들에 저항하는 미적 기획에 다름 아닌 문화적 모더니티는, 진보하는 부르주아의 공적 세계가 엄폐한 사적 공간에서 되살아난 우울의 신 사투르누스(Saturnus)의 힘에 복속된 ‘토성의 아이들’을 탄생시켰다.”(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7장)

말하자면 멜랑콜리아는 사회적 모더니티의 항체로 존재하는 문화적 모더니티의 근본 정조다. 이렇게 본다면 이 영화의 배경이 어째서 그토록 으리으리한 저택이어야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세상과는 동떨어져 있는 듯한 그 공간이 오늘날 각 나라의 최상류층들이 거주하는 그들만의 세계를 표상한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곳에서 저스틴은 극심한 우울을 앓는다. 그녀의 멜랑콜리아는 어쩌면 이 세계 자체를 견디지 못해 생겨난 증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밀고 나가본다면 그녀의 우울이 결혼식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이 설정의 알레고리적 함의는, 근대 부르주아적 가치관을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멜랑콜리아의 부정적인 위력에 대한 옹호, 바로 그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저스틴은 앓음으로써 싸운 것이 아닌가.

한 가지를 덧붙이자. 근대 부르주아적 가치관의 총집결지라고 할 수 있는 그곳의 소유주는 물론 저스틴의 형부 ‘존’이지만, 그곳의 본질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한명의 캐릭터가 더 필요했는데, 그는 바로 저스틴의 직장 상사 ‘잭’이다. 결혼식장에서까지 저스틴에게 업무를 강요하고 새로 뽑은 직원에게 저스틴을 따라다니며 카피를 받아내라고 종용하는 그의 행태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병리적이라는 측면에서는 저스틴 못지않아 보이는 그의 모습은, 그러나 오늘날의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병리성 그 자체의 재현이 아닌가. 저스틴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무’(nothing)라는 단어를 건네줄 때, 이는 저 ‘정신 없는 전문가’와 ‘가슴 없는 향락자’들의 세계의 허망함을 통렬히 공박하는 것처럼 보인다.

종말을 상상하는 서사의 불길한 매혹

이야기는 2부로 넘어가고 언니 클레어가 중심에 선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상태가 더욱 악화된 저스틴을 돌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행성 멜랑콜리아의 접근에 노심초사한다. 저스틴의 우울의 서사가 클레어의 종말의 서사로 이어졌다. 1부의 도입부와 결말부에 저스틴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천문(天文)의 변화를 읽어보려 애쓰는 대목이 나오기는 하지만, 적어도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의 이름은 2부에서 처음으로 갑자기 등장한다. 이 물음을 이제 물을 때가 됐다. 어째서 두 이야기는 붙어 있어야 했던 것일까. 그러니까 왜 저스틴의 멜랑콜리아가 결혼식을 망친 뒤에 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를 향해 달려올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더 간단히 물어볼까. 왜 그 행성의 이름은 하필 멜랑콜리아인가.

2부는 종말에 대처하는 자세들의 유형을 보여준다. 존은 종말을 부인하고 클레어는 종말을 걱정하며 저스틴은 종말을 수락한다(나는 ‘기다린다’라고 썼다가 고쳤다. 가족들에게 닥칠 종말을 그녀가 슬퍼하지 않는 것은 아니므로). 2부의 도입부에서는 자신은 행성 따위를 두려워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라며 종말에 의문을 제기하던 저스틴이 2부의 후반부에서는 종말이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단언한다. “우울한 인물은 죽음의 그림자에 쫓기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우울증 환자다. 혹은, 세계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울한 인간의 관찰에 스스로를 내맡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에 생명이 없으면 없을수록 그것을 숙고하는 정신은 더욱 강력하고 예민해진다.”(수잔 손택, <우울한 열정>, 77쪽) 이 말 그대로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녀는 어찌 그리 의연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 중 하나는, 1부에서 존이 이 저택의 골프장에는 18번 홀까지 있다는 사실을 두번이나 강조했음에도, 종말 직전 아들 레오를 붙들고 비틀거리는 클레어의 옆으로 19번 홀을 표시하는 깃발이 보란 듯이 펄럭이는 장면이다(이 장면은 프롤로그에서도 미리 등장하는데 물론 거기에서도 19라는 숫자 는 분명하게 보인다). 이 의도적인 착오는 우리로 하여금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환상인지를 순간적으로 분별하기 어렵게 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보고 있는 종말의 서사가 저스틴의 우울증적 비전(vision)일 수도 있겠다는 추정으로 우리를 유도한다. 돌이켜보면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저스틴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장면이며(그녀는 무언가를 본다), 프롤로그를 수놓고 있는 움직이는 이미지들 역시 멜랑콜릭의 시선이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을 영상으로 구현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말하자면 2부의 종말이 1부의 우울을 만든 것이 아니라(우리가 앞서 기각했듯이), 1부의 우울이 2부의 종말을 초래한 것이다. 그래서 2부의 행성은 멜랑콜리아라는 이름을 저스틴으로부터 내려받아야 했다. 2부가 클레어를 중심으로 진행되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종말의 서사를 내부에서 지켜보고 있는 저스틴의 눈이다. 감독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바로 저스틴의 눈 속에 있다. “지구는 사악해. 우리는 지구를 위해 비통해할 필요가 없어.”(The earth is evil. we don’t need to grieve for it.) 이것은 라스 폰 트리에의 복화술이다. 그는 지금 멜랑콜릭의 시각에서 지구의 종말을 상상한다. ‘내게 이 세계는 이미 죽어 있는 무의미한 세계다. 그러니 당장 지구의 종말이 온들 호들갑을 떨 일이 뭐 있는가.’ 이를 ‘멜랑콜리아의 세계관’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일본의 젊은 사상가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2010)의 한 대목에서 종말론자들을 신랄하게 조롱한다. 종말론자들의 욕망의 논리는 이렇다. ‘나는 어차피 죽는다. 그러나 나만 죽는 것은 싫다. 세계 전체를 끌어들여 다 함께 죽고 싶다.’ 자신의 죽음과 세계의 죽음을 일치시키려는 욕망, 즉 세계와 함께 자살하려는 이 욕망은 나약하고 유치하다. 종말론자들의 이 욕망은 얼마나 끔찍한 파국을 초래해왔던가. 그러나 라스 폰 트리에가 보여주는 종말의 비전은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것이다. 우리가 ‘멜랑콜리아의 세계관’이라고 부른 그것은 종말이라는 지평 위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의 다른 이름이다. 영원한 진보에의 확신을 단숨에 무(‘nothing’)로 돌리는 그 사유의 지평이야말로 급진적인 것일 수 있다는 것이 이 감독이 궁극적으로 하려던 말은 아니었을까.

마지막 물음을 던지자. 영화 대단원에서 우리 대부분이 느낀 저 불길한 매혹의 정체는 무엇일까. 단지 아름다운 영상의 속임수일까? 혹은 저것은 영화일 뿐이라는 안도감? 아닐 것이다. 혹자는 이 영화에서의 종말이 ‘완벽’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 이 세계의 모든 불행과 비참이 철저히 차별적인 데 반해 이것은 모두에게 완전히 평등한 종말이고, 타협적으로 희망을 남기는 여느 종말 서사들과는 달리 일말의 가능성도 남기지 않는 깨끗한 종말이다. 이렇게, 모두가, 동시에, 사라질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우리에게는 필사적으로 이 세계의 종말을 막아야 할 간절한 이유가 과연 얼마나 있는 것일까? 영화관을 나와서 그제야 눈물을 흘린 몇몇 관객은 아마도 그 이유를 찾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울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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