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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행복해져라, 웃음을 통해
진중권(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2-08-17

이질적 언어의 공존과 충돌

“첫눈에 보아도 외롭기 짝 없는 무덤이었다. 그 무덤 앞에는 높이가 두어자가량 되어 보이는 묘비가 서 있는데 그 묘비에는 ‘난고 김병연지묘’(蘭皐 金炳淵之墓)라는 일곱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작가 정비석이 ‘김삿갓’의 묘를 둘러보고 남긴 글이다. 소설 <김삿갓>의 저자이기도 한 정비석은 김삿갓을 “유일한 서민시인”이라 평하며, 그가 “진실로 서민 속에서 자생한 위대한 생활 시인”이었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언문진서

김삿갓의 시들이 얼마나 파격적인지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어느 서당에서 무시당한 뒤 남겼다는 모욕시다.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 뜻으로 풀면 이런 내용이 된다. ‘이 서당을 일찍 알고 와보니, 방 안에 모두 귀한 분들뿐인데, 생도는 채 열이 안되고, 선생은 와서 얼굴도 비치지 않는다’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를 음으로 읽으면 ‘내조지’, ‘개존물’, ‘제미십’, ‘내불알’ 등 들어주기 민망한 욕설이 된다.

그는 한글과 한문을 뒤섞는 파격도 꺼리지 않았다. “데각데각登高山 시근뻘뜩息氣散 醉眼朦朧굶어觀 욹읏붉읏花爛漫.” ‘데각데각 높은 산을 오르니, 시근뻘뜩 숨결이 흩어지고, 몽롱하게 취한 눈으로 주린 배로 지켜보니 울긋불긋 꽃이 만발했다.’ 이렇게 언문을 마구 뒤섞어 시를 지어도 되냐고 좌중이 따져 묻자, 그는 태연히 대꾸했다. “諺文眞書석거作 是耶非耶皆吾子.” ‘언문과 진서를 섞어 지은 시도 그게 시냐고 시비를 거는 것들은 다 내 자식이다.’

설사 진서로 짓는다 해서 그의 시가 평범해지는 것은 아니다. “善化堂上宣火黨 樂民樓下落民淚 咸境道民咸驚逃 趙岐英家兆豈永.” 여기서 그는 각 행을 동음이의어의 반복으로 구성함으로써 교묘한 말놀이를 한다. ‘선정을 펴야 할 곳에서 화적떼같이 다스리니, 백성을 기쁘게 한다는 누각 아래 백성의 눈물이 떨어지고, 함경도 백성들이 모두 도망가니, 조기영의 가문이 어디 오래 가겠는가?’ 함경도 관찰사 조기영의 학정을 풍자한 시라고 한다.

김삿갓의 시에서는 거의 언제나 이질적 언어들의 공존이나 충돌이 존재한다. 가령 처음에 인용한 <욕설모서당>(辱說某書堂)에서는 한자어의 ‘의미’와 ‘발음’, 두 번째로 인용한 <개춘시회작>(開春詩會作)에서는 ‘언문’과 ‘진서’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용한 <낙민루>(樂民樓)에서는 한시라는 귀족적 ‘형식’과 풍자라는 서민적 ‘내용’이 서로충돌한다. 이중 욕설과 언문과 풍자는 민중의 언어에 속하고, 진서로 지은 한시의 훈독은 양반의 언어에 속한다.

바흐친이라면 이를 ‘헤테로글로시아’(heteroglossia)라 부르지 않을까? 이 러시아 평론가에 따르면, 헤테로글로시아, 즉 이어성(異語性)은 ‘소설’이라는 장르의 본질적 특성이다. 즉 소설은 그 자체가 저자, 화자, 등장인물의 상이한 언어들이 공존하며 충돌하는 장이라는 것이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 바흐친은 외려 소설 속 저자나 화자가 구사하는 언어야말로 이어성이 발생하는 주요한 장소라 보았다.

바흐친은 이어성이 서사시(나아가 시 일반)와 구별되는 소설이라는 장르만의 고유한 특성이라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시를 통해 이어성을 드러냈던 김삿갓은 이 일반론의 예외를 이루는 셈이다. 바흐친에 따르면, 상이한 언어는 동시에 상이한 세계관을 반영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김삿갓은 양반이면서 양반일 수 없었고, 서민이면서 서민일 수도 없었다. 김삿갓의 시 속의 이어성, 즉 두 언어의 공존과 충돌은 이런 존재의 모순을 반영한 현상일 거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널리 알려진 것처럼 김삿갓은 밥이나 술을 얻어먹거나, 혹은 하룻밤의 잠자리를 얻기 위해 시를 지었다. 청을 거절당하거나 접대가 소홀한 경우에는 모욕적인 시를 써서 보복을 하곤 했다. 이런 시 세계는 물론 ‘선비’가 추구하는 고상한 관념적(idealistic) 이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한마디로 김삿갓의 시를 추동하는 에너지는 ‘정신’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뉘어야 하는 ‘신체’에서 나온다. 이것이 그의 시가 가진 유물론적(materialistic) 특성이다.

그의 ‘기괴함’은 장원급제까지 했던 최고의 지성이 최악의 상소리를 내뱉는 험구로 전락했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거다. 가령 <욕설모서당>에 나오는 ‘내조지’, ‘개존물’, ‘제미십’, ‘내불알’과 같은 표현이나, <허언시>(虛言詩)에 나오는 ‘계집의 불알이 한 말’이라는 표현을 생각해보라. 가만히 보면 이 역시 적나라하게 육체와 관련된 어휘들임을 알 수 있다. 김삿갓의 시를 추동하는 신체는 바흐친이 말한 ‘그로테스크 신체’, 즉 먹고 싸고 씹하는 신체다.

‘양반’의 정신을 신체의 수준으로 격하시켜 원초적 평등을 이루려 한다는 점에서 김삿갓의 시놀이는 서양 중세와 르네상스의 카니발을 닮았다. 하지만 김삿갓이 자신을 완전히 민중으로 생각했던 것 같지는 않다. 가령 <양반론>이라는 시는 그에게 여전히 양반의 자의식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네가 양반이면 나도 양반이다. 양반이 양반을 못 알아보니 그게 무슨 양반인가. 조선에서 세 가지 성만이 양반인데 그중에 김해 김씨만이 으뜸 양반이지.”

조선의 라블레

그런 의미에서 김삿갓은 차라리 프랑수아 라블레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라블레 역시 학자이자 수사로서 당대 최고의 교양을 갖추고 있었으나, 정작 그의 저서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1532)은 남세스러운 성적 농담과 지저분한 분변증적 유머, 즉 ‘그로테스크 신체’의 표현들로 가득 차 있다. 제 것에 이질적인 민중의 언어적 코드를 받아들이는 헤테로글로시아를 실천하려 한 것이다. 그 책의 서문은 마치 김삿갓의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독자여, 친구들이여, 이 책을 펼치려면 편견을 접어두어라. 여기에 정말로 화를 낼 일은 없다. 병적이거나 사악하거나 더러운 것은 없다. 여기서 나는 자부심으로 빛나려 하지 않는다. 내 책에서 발견할 것은 웃음뿐이요. 내 마음이 추구하는 영광은 그것뿐이다. 슬픔이 얼마나 너를 잡아먹고 너를 패배시키는지 보아라. 나는 울음보다는 차라리 웃음에 대해 쓰련다. 왜냐하면 웃음은 인간을 인간적으로 만들고, 용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행복해져라.”

김삿갓은 그저 ‘민중시인’이기만 한 게 아니다. 그 역시 라블레처럼 양반의 언어 속에 민중의 언어를 받아들여 헤테로글로시아를 구현하려 했다. 그의 시가 이질적 언어의 공존과 충돌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를 ‘서민시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의 시 세계의 본질을 놓치게 될 것이다. 라블레가 그리스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통해 수많은 언어놀이를 만들어냈듯이, 김삿갓의 언어놀이 역시 한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그 반대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가령 서민의 예술이라 하는 탈춤이나 판소리에도 심심찮게 고급문학, 즉 중국의 시나 고사에서 인용한 표현들이 등장한다(가령 봉산탈춤과 판소리 <심청전>에 등장하는 ‘낙양동천이화정’). 이는 민중의 언어 속에 지배계급의 언어가 받아들여진 예라 할 수 있다. 바흐친은 헤테로글로시아를 주로 문학이라는 장르의 특성으로 보았지만, 이질적 언어의 공존과 충돌은 어쩌면 문화 자체의 존재방식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