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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의 아주 사적인 클래식] 모든 게 ‘의지’의 문제라고?

<하비>(Harvey), 헨리 코스터, 1950년

여자 아이돌이 트위터에 ‘의지’라는 단어를 남겼단다. 단어 자체의 뜻이야 뭐 나쁘겠냐만, 이 말을 자주 쓰는 인간들의 본성을 아는 나로선 보기가 싫었다. 의지라고 하면 곧장 파쇼 정권이 떠오른다. <의지의 승리>를 언급할 필요도 없는 것이, 과거 한국을 지배했던 정권들이 끊임없이 주입해온 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고야 말겠다’는 것을 빌미로 삼아 집단의 요구에 끌려다니기를 요구했다. 개별 존재의 자발성을 고취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권력을 쥔 인간이 원하는 대로 집단이 따르도록 강제성을 행사하곤 했다. 결국 빛나는 건 리더였다. 선생과 부모들이, 사내아이라면 응당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나는 성적과 상관없이 빈약한 의지 탓에 줄반장도 못 되는 아이였다. 아마 아버지는 그런 내게 적잖이 실망했을 거다. 학교를 떠나 직장에 가서도 시스템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지쳤다. 집단의 의지에 떠밀려 살고, 윗자리에 서기 위해 몸부림치는 게 역겨웠다. 그럴 때마다 혼자라는 생각을 했다. 겉으로 보기에 별 문제가 없었을 테지만, 집단의 힘이 억누를수록 점점 외톨이로 지냈다.

마크 월버그의 <테드>가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순항 중이다. 마초 캐릭터로 익숙한 그가 테디베어와 함께 사는 남자로 분했다고 한다. 근작 중 비슷한 예가 몇편 더 있다. 라이언 고슬링은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에서 인형을 곁에 두고 살며, 멜 깁슨은 <비버>에서 손에 끼는 인형 덕분에 우울증을 치료한 남자로 나온다. 더욱이 모두 터프한 배우들이 연기했다. 과거 남자의 판타지를 그린 존 슐레진저의 <빌리 라이어>의 빌리와 이 남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긴장사회의 산물이다. 그들은 차갑고 딱딱한 로봇 대신 따뜻하고 부드러운 인형으로부터 위안을 얻는 남자들이다, <비버>에서 인형은 남자에게 “나 말고는 아무도 네 심정을 알아주지 않아”라고 말한다. 우스꽝스러운 상황임에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 남자들의 대선배는 <하비>의 다우드다. 퓰리처 수상작을 각색한 <하비>는 거대한 토끼가 친구인 사십대 남자의 이야기다. 토끼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대하고, 난처함을 겪어온 누이가 그를 정신병원에 보내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코미디이지만 영화가 다루는 소재는 심각한 것이며, 영화도 그걸 모르진 않는다. 다우드는 사실 피곤에 전 현대인의 이면이다. 그는 삶에서 영리하기보다 즐겁기를 택한 사람이다. 그를 동정하던 어느 순간 나는 그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잃어버린 가치들을 떠올리게 된다. 원장이 던지는 질문- 당신은 늙고 지친 지구 어디에서 이런 친구(하비)를 찾았습니까?- 은 곧 내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현실에선 다우드를 영화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래서 수많은 다우드들은 아픔을 묻고 외롭게 살아가거나 가면을 쓴 채 빡빡한 인간으로 행세한다. 테디베어, 비버, 하비는 완충 같은 것이다. 완충 없는 삶에서 의지는 꺾이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혹시 집에서 곰인형을 껴안고 살더라도 창피해하진 말자. 처세술을 다룬 책을 읽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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