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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판 위의 말 <더 레이디>

아웅산 수치. 버마의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이자 민족민주동맹의 리더. <더 레이디>는 그녀의 1988년부터 1999년까지를 집중 조명한다. 1988년에서 출발하는 이유는, 영국에서 마이클 에어리스(데이비드 듈리스)를 만나 가정을 꾸렸던 그녀가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귀국했다가 민족운동을 이끌게 된 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999년은? 에어리스가 암으로 죽은 해다. 정부가 자신의 출국 기회만 엿보고 있는 걸 알기에 아웅산 수치(양자경)는 남편의 죽음을 라디오로 전해 듣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 비극적 로맨스의 종장이 최종 목적지였음이 뚜렷한 영화에는, 그러므로 ‘더 레이디’가 아니라 ‘더 허즈번드’(The Husband)라는 제목이 더 잘 어울렸을 것이다. 본편을 여는 것도 에어리스가 암 선고를 받는 장면이며, 과거 10년 중 선택된 순간들도 에어리스를 ‘내조의 왕’으로 옹립하기에 적절하다. 아웅산 수치는, 비유하자면 체스판 위의 말이다. 그녀가 맡은 임무는 자유를 박탈당한 버마인들의 ‘상태’를 세계에 전시하는 것이다. 그 상태의 단계적 나열을 통해 그녀는 그저 전진하면 된다. 반면 진짜 플레이어, 배후의 협상가는 에어리스다. 외국인으로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그는 그녀를 대신해 정부에 동료들의 안전을 요구하고, 그녀를 노벨상 후보에 올리는 데 성공하며, 국제사회에 협조를 요청하고, 두 아들의 뒷바라지까지 책임진다. 그래서 급기야 영화는 가택연금에 처한 아웅산 수치의 투쟁이 아닌 그녀와의 세월을 빼앗긴 에어리스의 고뇌에 바쳐진 것처럼 보이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희망의 메시지의 발신자는 누구인가. 그 답이 애매모호하거나 잘못되었다. 그래서 관광객으로 위장해서 얻어낸 버마의 풍경도, 아웅산 수치가 갇혀 있던 집에 대한 치밀한 고증도 애꿎은 스턴트에 머무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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