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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의 아주 사적인 클래식] 1인칭 다큐멘터리의 <시민 케인>

<셔먼의 행진> Sherman’s March, 로스 매켈위, 1986년

2004년 ‘광주국제영화제’는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임재철 선생이 참여한 마지막 광주국제영화제는 프로그램의 풍성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와이드스크린 영화의 황금시대’ 섹션을 보며 감동을 받다, 스트라우브와 위예 회고전에 가서는 졸린 눈을 비비며 스크린을 응시한 끝에 실패하곤 했다. 이어 들어간 극장에선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었으며, 동시대 영화에 대한 시선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 와중에 ‘로스 매켈위 특별전’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잘못 들어간 상영관에서 <위대한 연초>를 보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의 영화를 모른 채 살았을 거다. 올해 EBS국제다큐영화제에 매켈위가 초대됐다. 그의 영화 두편에서 Q&A를 맡게 된 나는 꺽다리 아저씨를 만날 기대에 부풀었다. 그런데 사정상 두편 모두에서 빠지고 말았다. 이런, 제기랄. 프로그래머에게 부탁해 인터뷰 자리를 겨우 허락받았으나 일정이 어긋나 그것마저 불발로 끝났다. 지금 내 앞에는 그의 영화를 5장의 DVD에 모은 박스세트가 놓여 있다. 그동안 고이 모셔둔(자막이 없으니 당연하다) DVD에 그의 사인을 받지 못해 많이 서운하다.

혹자는 시시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불평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게 매켈위 영화에 대한 칼럼을 쓰는 나이스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영화를 흉내내, 그와 관계된 나의 사소한 이력을 써두고 싶었다. 그의 다큐멘터리엔 ‘1인칭 다큐멘터리’, ‘다이어리 필름’ 같은 장르명이 붙는다(정작 그는 자기 영화를 ‘에세이 필름’이라고 부른다). 현재 보스턴에 사는 매켈위는 남부에 바탕을 둔 가족과 자신의 역사를, 어쩌면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역사와 사회적 이슈 곁으로 나란히 세운다. 비디오로 쓴 개인의 역사라는 점에서 그의 대표작은 <셔먼의 행진>이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를 짓밟은 셔먼 장군이 남긴 자취와 의미를 고찰할 것처럼 시작한 영화는 어처구니없게도 그즈음 총각이던 매켈위의 여성 편력을 기록하는 것으로 변질된다. ‘핵무기 확산 시대에 남부에서 낭만적인 사랑이 가능한지에 관한 명상’이라는 거창한 설명이 달린 영화는 결국 ‘매켈위의 행진’을 담는다. 이건 순례일까, 퍼레이드일까. 이번에 매켈위는 영화를 소개하며 자신의 한심한 짓거리에 많이 웃기를 바랐으나, 사실 그가 사적 역사와 우주를 빚는 방식은 경이롭다(평론가 리처드 페냐는 “다이어리 필름 장르의 <시민 케인> 같은 영화다”라고 썼다). 남부에 대한 사랑을 파괴로 망친 셔먼과, 각기 다른 감정으로 남부 여성들을 거쳐간 매켈위의 발걸음은 얼마나 다르면서 유사한가. 얼핏 의미없는 나열처럼 보이지만, 관객과의 대화에서 매켈위는 “개인의 기록을 타인에게 보여주려면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참, 그의 말에 따르면 <셔먼의 행진>이 영화화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린 이미 할리우드 버전을 보지 않았던가. <브로큰 플라워> 말이다(짐 자무시는 장 외스타슈의 죽음 때문에 1980년대로 돌아간 듯이 굴었지만, 기실 매켈위가 80년대의 어느 시간에 흘린 유쾌한 걸음을 뒤따른다). 그러니까 내가 궁금한 건 <셔먼의 행진>의 할리우드 버전이 아닌, 매켈위가 그 제작과정을 담을 다큐멘터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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