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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도가니] 영화로 상처가 치유되었으면

흉악한 세상, ‘힐링무비’의 의미를 확장시켜라

<하울의 움직이는 성>

세상이 흉악하다. 매일 뉴스에서는 참담하다 못해 인간성의 근본을 의심케 하는 얘기들로 도배질이다. 심지어 얼마 전, TV에서 흉악범의 현장검증을 생중계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무슨 올림픽 경기 중계도 아니고 현장검증을 그렇게까지 보여주는 의도는 무엇일까? 그런 것조차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방송사의 고충으로 이해해야 하는 걸까? 이런 성범죄자들에 대한 논의는 ‘예방’보단 ‘응징’이 주를 이루는 것 같다. 전자발찌, 화학적 거세에서 이젠 물리적 거세, 심지어 사형제 집행에 대한 얘기까지 하루가 멀다하고 성폭력 대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만일 주변에 가까운 사람이 피해자라면 나 역시 그렇게 팔짱 끼고 가해자의 인권이니, 사형제의 위헌성을 얘기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흉악한 세상에 영화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이런 참혹한 현실을 잊을 수 있게 좀더 달콤하고 즐거운 현실도피적인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현실보다 더 무섭고 흉악한 이야기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그나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영화보단 덜 위험하다는 걸 보여줘야 할까? 다양한 장르와 소재의 영화가 공존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요즘 들어 특히 어떤 얘기가 담긴 영화를 제작하고 수입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이전보다 심각한 고려 사항이 되었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는 흉악범죄가 기승을 부릴 때 비슷한 소재의 영화들의 흥행이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영화의 소재와 비슷한 사건이 터지면 대부분의 제작자나 수입업자는 그것을 흥행의 청신호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현실보다 더 강도가 센 사건을 영화로 접하면서 영화보다 덜한 현실에 살고 있음에 안도하는 것일까? 경제적인 불황의 시기에는 코미디가 잘된다는 통설도 이젠 별로 설득력없는 시대가 된 듯하다.

모두가 상처받는 시대에 ‘힐링’이라는 단어는 점차 생활 구석구석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친근한 용어가 되었다. 유명인들조차 TV의 힐링 프로그램에 나와서 치유받고 싶어 하는 시대, 사람들은 ‘힐링’이 들어간 모든 것에 열광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힐링무비’라고 불리는 영화가 한때 유행하는 듯하더니 금방 시들해졌다. 왠지 ‘힐링무비’ 하면 소소한 주제에 잔잔한 전개, 그리고 확실하지 않은 결론으로 끝맺음되는 이야기들이 전부인 것처럼 소개되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힐링무비’가 그런 것일까? 이전까지의 ‘힐링’의 의미가 조금은 확장될 필요성을 느낀다. 덜 자극적이고 조금 더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따듯한 시선으로 풀어낸 영화라면 모두 치유의 효과가 있는 영화가 될 수 있다. 한국영화든 외국영화든, 그게 실사영화든 애니메이션이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영화라면 크게 상관이 없다.

오래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러 갔을 때, 평일 낮시간의 극장 안은 대부분 어린아이들과 같이 온 부모들이었다. 아이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떠들고 마치 놀이터 한가운데서 영화를 보는 관람 분위기였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그 영화는 나를 치유했다. 조금은 이상적인 이야기이지만 대부분의 흉악범들은 정신적인 질환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한다. 그들이 어려서부터 폭력적이고 잔인하고, 성적인 충동을 심하게 자극하는 영화가 아닌 치유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면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영화가 시대의 상처를 치유하는 도구가 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소망한다.

힐링무비의 시장은 있는 걸까? 출판과 레저산업쪽은 확실히 ‘힐링’이 대세다. 하지만 흔히 ‘힐링무비’란 신조어로 마케팅되는 영화들은 주로 마니아에게 사랑받는 편이다. 한국에 소개된 힐링무비의 대표격인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카모메 식당>은 약 7천명, <안경>은 1만명가량을 동원했다. 제이슨 라이트먼의 <인디에어>나 알렉산더 페인의 <디센던트> 등은 약 5만명의 관객이 찾았다. 작은 규모로 제작돼 주로 예술영화전용관에서 개봉된 작품들이다. 아마도 이 영화들의 관객은 ‘힐링’보다는 ‘감독 이름’을 먼저 선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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