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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영화

데뷔작 <악어> 때부터 김기덕 감독에 주목했던 이유는

데뷔작 <악어> 때부터 김기덕 감독을 주목한 이는 드물었다. <씨네21> 전 편집장이었던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필름마켓 실장은 그 드문 경우 중 하나였다. <악어> 이후 김기덕 감독을 꾸준히 응원하고 지지해왔던 그의 감회 또한 남다를 터. 그에게서 김기덕 감독과의 첫 만남부터 최근의 만남까지, 숨겨진 이야기를 들었다.

H.O.T 팬과 윤제에겐 <응답하라 1997>이지만 한국영화 역사가에겐 <응답하라 1996>이 맞는 숫자일 것이다. 1996년은 한국영화사의 특별한 한 장을 장식할 만한 해다. 그해 5월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개봉했고 11월 김기덕의 <악어>가 선을 보였다.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린 그해, 우리는 동시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두 작가와 처음 만났다. 당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평단의 기립박수를 받은 반면 <악어>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김기덕의 일거수일투족이 뉴스로 나오는 오늘을 보니 <악어>로 처음 그와 만났던 생각이 난다.

스크린 확보를 위한 김기덕의 싸움

당시 남산의 옛 영화진흥공사 건물에 있던 시사실에서 열린 <악어> 시사회를 찾은 기자는 몇명 안됐다. 무명 감독, 무명 제작자, 조재현이 주연을 맡았지만 그도 당시 스타라고 할 만한 배우는 아니었다. 기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가 거의 없었기에 시사회장이 썰렁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김기덕은 대뜸 <악어> 촬영현장에 한번도 찾아오지 않은 기자에게 섭섭한 티를 냈다. 비록 적은 제작비로 무명 신인감독이 찍은 영화지만 열심히 만들었고 <씨네21>에 취재 와달라는 전화도 했는데 외면하더라, 라며. 나는 방금 본 <악어>의 엔딩장면을 어떻게 찍었는지, 이 영화의 난생처음 보는 이상한 매력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고 싶었다. 짧게 몇 마디 묻자는 심정으로 말을 건넸는데 그는 봇물 터진 듯 말을 쏟아냈다. 자살한 시체를 건지는 일로 돈을 버는 머구리의 존재, 한강 다리 아래 사는 부랑자의 삶, 잠시 시나리오교육을 받은 뒤 감독이 되기까지의 과정 등 <악어>가 우연히 나온 영화가 아님을 증명하는 말이 이어졌다.

얼마 뒤 배우 조재현을 만났을 때 그는 <악어> 현장에서 김기덕 감독이 제작자에게 맞고 울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 사람이 뭔가 해낼 사람이라는 걸 그때 봤어요. 빨리 촬영을 재개하려고 그렇게 펑펑 울면서도 김밥을 마구 입에 밀어넣고 다시 레디 액션을 부르더군요.” <무게>라는 영화로 이번 베니스영화제에서 김기덕과 더불어 수상한 전규환 감독도 그때 <악어> 현장을 경험한 사람이다. 당시 조재현의 매니저로 일했던 그는 김기덕 현장을 보며 연출자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알려진 대로 <악어>는 개봉한 지 며칠 만에 극장에서 사라졌다. 총관객은 3천명이 조금 넘었다. 베니스에서 돌아와 연 기자회견에서 김기덕은 <피에타>의 상영횟수가 적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무명 신인감독 시절 <악어>에서 18번째 영화 <피에타>까지 그는 참 꾸준히도 상영 기회를 더 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점잖지 못한 투정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김기덕은 몹시도 한국 관객의 사랑을 갈구해왔다. 영화제용 영화를 만든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지만 그는 집착에 가까울 만큼 한국 관객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다. <>을 개봉할 때 기자시사회도 열지 않겠다고 했던 것이나 <시간>을 개봉할 무렵 <100분토론>에 나와 <괴물>의 흥행에 대해 삐딱한 발언을 했던 것도 모두 자기 영화를 좋아해달라는 요구의 다른 표현이라 생각한다. 비평이나 흥행에 무심한 감독이 행여 하나라도 있을 리 없지만 김기덕에게 그것은 참으로 절박해 보였다. <악어>에 이어 <야생동물보호구역>을 개봉시킨 뒤 그는 “악어가 배를 허옇게 뒤집은 채 죽어가고 있다”는 내용의 팩스를 여러 언론사에 보냈다. 개봉한 지 1주일도 안됐는데 극장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영화를 살려달라는 호소였다. 그러나 응답하는 이는 없었고 <야생동물보호구역>은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했다.

김기덕 영화를 지지하는 영화평을 쓰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때였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내가 하는 수밖에.’ 막상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자 막막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쓸 때 우선 하는 일은 비슷한 영화의 계보를 떠올리는 일인데 김기덕의 영화에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본 적 있는 영화라야 족보를 읊고 아는 척을 할 게 아닌가. 어렵게 <악어>와 <야생동물보호구역>의 독창성에 주목하자는 글을 쓰고 나자 주위에서 이런 말들이 들려왔다. “그렇게 안 봤는데 남기자 변태 같은 데가 있네.” 솔직히 말하면 한동안 불안했다. 내가 틀렸으면 어쩌나. 정말 후진 영화를 나만 좋다고 우기는 거면 어쩌나. 영화에 관해 글을 쓰는 직업을 택한 건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남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내가 다른 평론가의 글을 보며 새로운 영화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렸듯 나도 남들이 그 매력을 잘 모르는 영화를 널리 알리고 싶었다. 하나 예상 못했던 것은 때로 그 일이 힘에 부치거나 외로운 싸움이라는 사실이었다. 나의 언어는 어설펐고 나의 능력은 미천했다. 김기덕은 내게 시험이자 숙제였다. 언제나 마음에 안 드는 시험 답안지를 제출하고 마무리 안된 숙제를 제출하면서도 뭔가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김기덕의 지지자는 언제나 소수였고 정성일 평론가가 나서기 전까지 그를 지지하는 글을 쓰겠다는 사람을 찾기 쉽지 않았다. 그가 <빈 집>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고 난 뒤 나는 “9년 전 나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해서 뿌듯했고 8년 전 불면의 밤이 헛되지 않아서 기분이 좋았다”고 썼다. <사마리아>와 <빈 집>이 베를린과 베니스에서 상을 받고 돌아온 다음 이제야 비로소 김기덕이라는 시험을, 숙제를 내려놓을 수 있겠구나 안도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의 싸움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2009년 파주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영화는 영화다>를 제작해서 개봉한 뒤 수익배분을 받지 못한 데다 후배 감독이 자신을 배신했다며 큰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다. 더이상 영화를 만들 에너지가 없다며 2011년 <아리랑>으로 돌아오기까지 잠적했다. 폐인이 됐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들려오던 차에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 신작 <아리랑>이 공개됐다. 주목할 만한 시선 대상은 김기덕에게 큰 힘이 된 것 같다. 1년에 2편씩 찍던 옛날처럼 <아리랑> <아멘> <피에타>가 이어졌다.

‘거장’ 김기덕에 대한 비아냥이 듣기 싫다

<피에타>가 김기덕의 다른 영화보다 걸작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악어>와 <야생동물보호구역>에 큰 감흥을 느꼈던 나로선 <아리랑>도 훌륭했고 <피에타>도 좋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상영 기회를 더 달라고 외치고 있고 왜 이런 영화가 좋다는 건지 이해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여전히 다수다. 나는 다시 잊고 있던 숙제를 펼쳐들었다. <피에타>에 관한 여러 좋은 평이 나왔기에 더 보탤 것은 없다. 그저 <아리랑>이 소통 불가능한 자학의 넋두리에 불과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아리랑>에서 김기덕은 자학의 밑바닥까지 갔다 창작의 길로 돌아오는 여정을 보여줬다. 셀프 다큐멘터리였던 영화는 극영화로 돌변하는데 그러면서 복수극이 펼쳐진다. <아리랑>에서 이어지는 이 복수극의 완성본이 <피에타> 같다.

이제는 모든 신문 1면에 얼굴이 실린 이른바 ‘거장’이 됐지만 김기덕 영화를 만장일치 좋아할 리는 없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실은 간간이 들리는 ‘거장’ 김기덕에 대한 비아냥이 듣기 싫어서다. 박찬욱이나 이창동과 달리 김기덕은 황금사자상을 받아도 많은 이에게 이물질 같은 존재다. 조금이라도 그런 이물감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싶어서 김기덕에 관한 글을 쓰고 또 쓴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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