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디스토피아로부터
[김진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메멘토 인셉션 그리고 박근혜
김진혁(연출) 일러스트레이션 이선용(일러스트레이션) 2012-10-01

이제는 <다크 나이트> 시리즈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2001년 초짜 시절(?)에 만들었던 <메멘토>란 영화가 있다.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찾아 죽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인데, 영화 말미에서 주인공은 이미 범인을 죽였음에도 그걸 잊고 계속 범인을 찾아 헤매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이 한줄의 설명에 딱히 살을 더 붙일 것이 없을 만큼 스토리는 단순하다.

하지만 이 단순한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고 크리스토퍼 놀란이란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이후 그는 다시 ‘기억’에 관한 두 번째 작품인 <인셉션>을 만드는데,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가 ‘기억’에 집착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아마 아는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나 역시 바로 이 ‘기억’에 집착하는 편이다.

흔히 우리는 ‘기억’을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담긴 데이터라고 생각한다. 절반은 맞지만 절반은 틀리다. 컴퓨터 하드디스크엔 프로그램에서 작업한 ‘그대로’의 데이터가 저장되지만 인간의 기억은 어떤 경우에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저장하지 않는다. 처한 상황에 따라 혹은 유불리에 따라 적당히 ‘각색’해서 기억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데이터는 건드리지 않는 이상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처음과 변함이 없지만, 인간의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계속 변한다. 그래서 나중에 그 기억을 다시 꺼내오면 맨 처음의 기억과는 영 딴판이 되기 일쑤다. 처음엔 고통이었던 것이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고, 거꾸로 당시엔 기쁨이었던 것이 지나고 나면 창피함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기억’의 가장 놀라운 점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사실을 나중에 만들어내서 ‘기억’한다는 점이다. 놀이공원에 가지 않았던 이들에게 놀이공원 사진을 보여줬더니 그중 상당수가 어릴 적 놀이공원에 갔었다고 말했다는 실험은 너무나 많이 인용돼 굳이 추가설명을 할 필요가 없지 싶다. 이처럼 ‘기억’은 하드디스크의 데이터처럼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사라지고 변형되는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도 변화 중인 영화 <인셉션> 속의 세상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최근 여당의 대선 후보인 박근혜 의원이 과거 한 공중파에 나와 했던 인터뷰가 인터넷을 통해 급격하게 퍼졌다. 해당 인터뷰 내용의 요지를 간략하게 추리면 “아버지 박정희는 근본적으로 잘못한 게 없다”라고 할 수 있다. 때론 실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피해를 입은 분들도 있겠지만 의도는 어디까지나 ‘구국’을 위해서였고 그 진정성만큼은 추호의 의심도 없다는 게 박근혜 의원의 주장이다.

영상을 보면서 놀란 감독의 <메멘토>와 <인셉션>이 떠올랐다. 박근혜 후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이미 밝혀지고 검증된 수많은 사실과는 완전히 반대의 모습인데, 이는 박근혜 후보의 ‘기억’ 어딘가는 <메멘토>처럼 잘려나가져 있고, 또 다른 어딘가는 <인셉션>처럼 바꿔치기되어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후보는 놀란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기억’의 오류에 가장 부합하는 예인 셈이다.

참고로 <메멘토>의 ‘기억상실’과 <인셉션>의 ‘기억 바꿔치기’를 좀더 일반적으로 표현하면 ‘누락’과 ‘왜곡’이 된다. 그러고 보면 놀란은 애초부터 ‘고담시티’로 향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