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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진의 미드 크리에이터 열전] 실화를 다루는 감각
안현진(LA 통신원) 2012-10-05

<데미지스>의 KZK

대니얼 젤먼, 토드 A. 케슬러, 글렌 케슬러(왼쪽부터).

당신이 함부로 건드리고 싶지 않을 두 여자가 있다. 한 여자는 무자비한 승부사인 중년의 변호사 패티 휴즈(글렌 클로즈)이고, 다른 한 여자는 패티와의 싸움은 정정당당하게는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변호사 엘렌 파슨스(로즈 번)이다. 2007년 첫선을 보인 <데미지스>(<FX>)에서 각각 저명한 로펌의 대표와 햇병아리 변호사로 처음 만났던 두 사람은 지난 9월12일 시리즈의 막을 내린 시즌5에 이르러서야 복잡한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굿 와이프> <수츠> <체인지 디바> 등 동시대의 법정드라마는 많지만, <데미지스>는 법정 공방이나 배심원의 평결보다는 법정 밖의 뒷거래에 주목하는 어두운 매력을 가졌다. 또 여배우 투톱이라는 흔치 않은 설정이 돋보이는 수작이었기에, 그냥 떠나보내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엔 <데미지스>의 크리에이터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척, 드라마에 대한 예찬을 펼치려 한다.

<데미지스>는 ‘KZK’라는 크리에이터팀이 만든 TV시리즈다. KZK는 글렌과 토드 A. 케슬러 형제에 대니얼 젤먼이 더해진 트리오인데 팀 이름은 각자 성의 첫 글자를 조합해 만들었다. 토드 A. 케슬러는 이미 <소프라노스>의 작가로 경력을 쌓았지만, 나머지 둘은 <데미지스>와 함께 그들의 경력도 성장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명성은 달랐지만 엔터테인먼트 산업 내에서의 권력 다툼에 흥미를 느낀 세 사람은 여자가 권력의 주인공인 이야기를 만들기로 의기투합했고, 단 한번의 피칭으로 시리즈가 발탁되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첫 시즌에서 법대를 갓 졸업한 엘렌은 꿈에 그리던 패티의 로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다. 그런데 패티가 엘렌을 고용한 배경에는 곧 있을 집단소송의 주요 증인이 엘렌의 친구라는 계산이 있었다. 몇수 앞을 내다보는 패티의 전략에 보통사람들이라면 넋을 놓고 당했겠지만 엘렌은 달랐다. 패티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고 뒤통수를 맞고 살인자로 몰리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엘렌은 독종처럼 살아남았다. 그리고 마지막 시즌에서 둘은 한 사건의 양쪽 변호사로 맞대결을 펼친다. 패티와 꼭 닮게 성장한 엘렌의 캐릭터는 설득력있었고 둘 사이의 긴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데미지스>가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고 시청자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지 않았던 건 드라마의 인장이나 다름없는 플래시백 구조 덕분이었다고 KZK는 말한다. <데미지스>는 첫 에피소드에서부터 엔딩의 일부를 보여주고, 회를 거듭할수록 앞뒤를 오가며 이야기에 반전과 트릭을 붙이는 플래시백 구조로 유명하다. KZK에 따르면, 이런 특별한 구성이 인물과 플롯을 발전시키는 데 제한을 만들었고, 그것이 세 사람의 의견을 조율하는 데 도움이 됐다. <데미지스>의 또 다른 특징은 매회 새로운 사건이 등장하는 레퍼토리 형식의 법정드라마와 달리 한 시즌 동안 굵직한 사건 하나만 다루었다는 점이다. 특히 그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의 각색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캐릭터의 이름과 연령대는 바뀌었지만, 2001년 엔론 사태, 미국의 에너지 위기, 버나드 매도프의 금융 사기(폰지 사기), 중동 파병군인들의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 위키리크스 스캔들 등 잘 알려진 사건이나 법정 공방이 시즌마다 패티와 엘렌이 집중하는 소송으로 다루어졌다.

무한경쟁의 미국 TV에서 제대로 된 마침표를 보기가 쉽지 않아서인지 <데미지스>가 보여준 시리즈의 엔딩은 <와이어> <소프라노스>의 엔딩과 비슷한 여운을 남겼다. 완결성 면에서는 결코 부족하지 않지만 여지를 남기는 오픈엔딩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지 않은가. <데미지스>는 끝났지만, 새로운 드라마들이 시작되는 가을 시즌이 벌써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