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진실과 행복의 딜레마 <용의자 X>

영국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에서 추리문학이 하나의 장르문학으로 자리잡지 못한 이유가 ‘사회구조의 불안정성’ 때문이라는 분석을 들은 적이 있다. 안정된 구조의 사회 혹은 변화 가능성이 많지 않은 사회라야만 일상적으로 예측 가능한 논리가 유효한 추리소설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간의 한국영화들에 가장 빈번하게 원작을 제공하는 것은 일본의 미스터리 스릴러 혹은 추리소설들이다.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에 이어 <용의자 X>를 통해 또다시 한국영화의 원작자가 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탄탄한 구성력과 폭발력있는 반전때문에 사랑을 받았고 일본에서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원작이 되기도 했다.

원작 <용의자 X의 헌신>은 니시타니 히로시에 의해 2009년에 이미 동명의 영화로 제작된 바 있다. 방은진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원작에 충실한 영화를 또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며 일본 작품과는 차별적인 각색을 강조했다. 원작이나 일본영화가 천재 수학자와 물리학자 사이의 두뇌싸움에 초점을 맞추면서 지성이나 논리에 포함될 수 없는 ‘사랑’을 반전을 위한 변수로 책정하고 있다면 이번 영화는 ‘용의자 X’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보여주는 ‘헌신’에 초점을 맞춘다. 수학천재였지만 현재는 인기없는 수학교사인 석고(류승범)는 흠모해왔던 이웃 화선(이요원)이 전남편을 살해한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불안해하는 화선과 조카를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라며 완전범죄를 위한 계획을 짠다. 시신이 발견되자마자 화선을 용의자로 지목한 형사 민범(조진웅)은 그녀를 감시하는 과정에서 고등학교 동창인 석고와 재회하게 된다. 그는 석고와 화선 사이의 묘한 감정의 흐름을 간파하고 형사로서의 사명과 동창으로서 우정 사이에서 분열된 채 사건을 파악해간다. 화선은 석고가 짠 설계도를 따라 단 한번의 거짓 진술도 할 필요없이 완벽하게 살인사건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오로라 공주> 이후 7년 만에 메이저 영화계로 복귀한 방은진 감독의 귀환은 반갑다. 이 영화는 출연배우들의 말마따나 맘 놓고 연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판을 만들어준 것이 틀림없다. 특히 돋보이는 배우는 류승범이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주로 코믹과 액션에만 한정되어 있었던 자신의 필모그래피가 충분히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그가 이제까지 지켜왔던 장르적 한계들은 이 영화에서 오히려 관객을 속일 수 있는 함정을 파는 데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후반부에 스토커로 변모해가는 석고의 모습이 화선뿐 아니라 관객의 숨통까지 조일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전작들에서 배우가 쌓아왔던 아우라의 덕을 많이 입고 있기 때문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이 ‘아무도 풀 수 없는 문제를 만드는 것과 그것을 푸는 것, 둘 중에 뭐가 더 어려울까?’라는 질문을 통해 팽팽한 긴장력을 유지하는 데 상당히 공을 들였다면 <용의자 X>는 ‘진실을 밝힌다고 해도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는 문제’라는 진실과 행복의 딜레마를 정서적 차원에서 구현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은 주인공과 두뇌싸움을 벌여야 하는 물리학자를 삭제하고 관객의 논리와 감정의 충실한 대리인이 될 수 있는 민범을 복잡한 살인사건과 불가해한 사랑을 설명해줄 안내자로 설정했다. 이를 통해 영화는 미스터리 스릴러 대신 호소력 짙은 멜로의 외피를 입게 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이런 게 사랑입니까?’ 라는 질문에 정당하게 공명한다고 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누군가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시계 부품’처럼 소비된 누군가의 육체에 대해서, 이 작품은 전혀 애도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고와 화선을 위해 흘린 눈물이 극장을 나온 뒤까지 울림을 갖기는 힘들어 보인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