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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햇살의 바디감 그리고,
김선우 2012-10-22

가을볕이 좋다. 커피나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이 흔히 쓰는 ‘바디감’ 이라는 말을 빌리자면, 바디감은 가을볕이 단연 최고다(영어 조합어인 바디감이라는 말에 딱 맞춤한 우리말을 아직 못 찾았다. ‘밀도감×중량감’의 총체인 이 말과 적절히 바꿀 우리말이 있으면 누가좀 알려주시길). 아무튼, 계절마다 달라지는 햇살의 바디감을 즐길 수 있다는 건 사계절이 있는 땅에 사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퍽 좋은 쾌락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하는 편.

‘햇살의 바디감’ 운운하며 마음 어딘가 간질거리는 걸 보니 가을이긴 한가보다. 며칠 전 후배에게서 이런 문자 메시지가 왔다. “언니, 저 가을 타나 봐요. 쓸쓸해요 으헝~.” 나는 이렇게 답문자를 보냈다. “반가운 소리! 잘 살아 있다는 증거. 가을은 타줘야 맛이지.” 후배의 답, “글쵸~ 다행이닷. 쓸쓸해서 아고라 서명하고 왔어요. 칭찬해주삼”. 나의 답, “무슨?” 후배 왈, “투표시간 연장 캠페인요”. 그러고 보니 그 후배는 몇년 전 백수생활을 청산하고 ‘비정규직 직장인’이 된 뒤 투표시간이 빠듯해 참정권 행사도 어렵다고 투덜대곤 했다. “멋지다! 그대의 아름다움의 비결이 가을 타는 데 있었구나!!” 느낌표를 두개나 찍어 답 문자를 보내놓고 나도 얼른 서명하러 갔다.

최근 이슈 중 내게 가장 유쾌한 것이 투표시간 연장에 관한 것이다. 맞아! 투표권을 행사하는 다수의 요구에 따라 투표시간을 연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여태 왜 못했지? ‘6시 땡’ 투표시간을 하늘에서 정해준 것처럼 받들어 모셔야 할 이유가 대체 뭐야? 위에서 뭔가 정해지면 웬만하면 그냥 따라가는 데 익숙한 정서, 상명하복의 희한한 복종체계가 마음까지 지배해버렸기 때문일까. 명색이 예술가인 나는 왜 좀더 일찍 이런 문제제기를 못했는지 조금 부끄러웠다. 질 좋은 자유를 위해선 다른 상상이 필요해. 요구하자고! 우리 가능한 시간에 투표할 권리!

‘쓸쓸해서 서명하고 왔다’는 마음의 무늬가 잘 보이는 가을이다. 가을 타는 마음과 참정권의 질을 높이는 일 사이가 그리 멀지 않다는 걸 불현듯 깨닫는다. 가을을 타자. 가을 탈 여유도 없이 일상의 쳇바퀴에 굴복해 살아가기엔 인생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스스로의 삶의 질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게 만들기 위해선 상상력의 틈새가 필요하다. 쓸쓸해서 서명하고, 기뻐서 기부하고, 분노해서 포옹하는! 살벌한 바리케이드 앞에서 뜨겁게 키스하는 연인들이 68혁명의 상상력을 맘껏 고양시켰듯이, 그런 파격의 틈새를 스스로의 일상에 많이 허락하며 살아야 하는 가을이다.

아 참, ‘쓸쓸해서 함께 걷는’ 사람들 이야기도 전해야겠다. 제주도에서 출발해 서울까지 이 땅의 생명과 평화를 기도하며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생명 평화 대행진’을 찾아보시라. 이 아름다운 순례의 행렬이 내가 사는 지역에 가까워질 때 ‘쓸쓸해서 밥 한끼’ 함께 먹어도 좋으리라. 쓸쓸해서 풍성해지는 가을이 왔다. 가을을 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