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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그러니까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고
김혜리 2012-10-25

호소다 마모루의 <늑대아이>를 보고 쓰는 편지

*<늑대아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너에게.

네가 이 비밀을 알까? 모든 영화는 각기 다른 종류의 글을 쓰고 싶게 해. 어떤 영화는 귓전에 격문을 불러줘서 받아쓰게 되고, 또 다른 영화는 기도문을 짓고 싶게 만들어. <늑대아이>를 처음으로 본 저녁에 나는 아직 작곡되지 않은 노래의 가사 같은 걸 끄적이고 싶었어. 그리고 두번째로 <늑대아이>를 보러 간 날 밤에는,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네가 옆자리에 있고 극장엔 오직 우리뿐이어서 네게 “아! 이 부분은 마치…”라고 토를 달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상상했어. 바로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이유야.

<늑대아이>는 10대 소녀 유키의 내레이션으로 영화를 이끌어 가. 영화의 초반은 유키의 엄마인 하나가 대학에서 수업을 청강하던 아빠를 만나 사랑하게 되고, 얼마 뒤 그가 늑대인간임을 알게 되고, 그래도 상관없이 계속 사랑하고, 남매를 낳아 홀로 기르게 된 역사를 들려주지. 그래, 폴린 카엘이 정리한 <대부2>의 매혹이 여기도 있어. 내가 태어나기 전 부모들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그들은 사랑이란 걸 했는지 알기 원하는 우리의 애틋한 충동. 어떤 관객은 픽사의 <업>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어. 개구쟁이 꼬마의 모험담인 줄만 알았는데 순식간에 일생을 요약해 버린 <업>의 대담한 첫 30분을 기억하지? 사실 내가 즉각 떠올린 건 라가와 마리모의 <아기와 나>라는 만화였어. 동생을 낳자마자 세상을 떠난 엄마를 대신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소년이 주인공인 이 작품은 상당히 긴데 난 그 가운데 한권만 간직하고 있어. 대학생 아빠와 도시락 가게 아르바이트생이었던 스무살 엄마가 처음 만나 사랑하고 아이를 갖기까지를 그린 13권. 영화로 치면 작품 전체에서 예외적 플래시백 시퀀스에 해당되지. <아기와 나> 13권은 사고로 일찍 부모를 잃은 두 ‘고아’가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고 새로운 가정을 시작하는 이야기고 <늑대아이>의 1장도 마찬가지야.

난 늑대인간이라는 판타스틱한 캐릭터를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영화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극히 태연한 매너에 설렜어. 감독의 전작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9)에서 주인공 마코토가 시간여행 능력을 갖게 됐다고 털어놓았을 때 이모의 반응이 생각나? “10대 소녀들한테 종종 일어나는 일이란다.” 마코토는 그만 “오, 그런 건가” 하는 표정으로 납득하고 말잖아. 미래로부터 온 소년 치아키 역시 마코토에게 정체를 밝히기 위해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아. “어쩌다보니 너희들과 노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여름이 가버렸어”라는 게 고작이야. <늑대아이>도 영락없이 한핏줄이야. 하나는 섣달 보름밤 남자친구의 출생의 비밀을 듣고 “아, 세상은 내가 모르는 일로 가득하구나”라고 수긍해버려. 13년 뒤 그녀의 딸 유키는 관객에게 “그런 일이 있어요” 라는 한마디로 판타지를 기정 사실의 세계 안으로 쑥 밀어넣고.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현실과 분리돼 밀봉된 판타지 월드를 만들지 않아. ‘세컨드 라이프’ 같은 가상현실 세계가 중요한 배경인 <썸머워즈>(2009)에서도 디지털 인터페이스를 무대로 한 시퀀스는 꼬박꼬박 인물들이 처한 현실로 귀환해 매듭지어지지. 하긴 호소다 마모루는 심지어 <디지몬 어드벤처 : 우리들의 워게임>(2000)에서도 디지몬 우주가 아니라 힘을 모아 컴퓨터 버그를 물리치는 현대 도쿄의 아이들을 소재로 택했던 감독이었어. 아마 동일한 이유에서 호소다 마모루는 늑대인간의 고독을 별난 조건으로 부각하지 않아. 현명해. 늑대인간이 극단적인 아웃사이더라는 사실은 존재만으로도 너무나 확고해서 영화가 따로 호소하지 않아도 관객의 마음에 어디까지나 매달려 있으니까. 영화는 전제를 간단히 확인하고 외양을 잠깐 보여주는 걸로 충분해. 그리고 그의 외로움과 공포가 우리의 그것과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에 집중하면 돼. <늑대아이>는 어찌 보면 시나리오 내용대로 그저 청강생, 전학생, 이주민과 사귀는 법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몰라. 늑대남자가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노인만 사는 집도, 아이만 사는 집도 있어. 집집마다 모두 달라”라고 말하는 건 자기만이 외따로 고립된 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독백인 셈이지. 그의 직업이 이삿짐센터 인부인 것도 아마 매일 다양한 사람들의 집을 들여다보며 모두 다름을 확인할 수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잠시 상상해보았어. 결국 늑대남자는 인간들처럼 하루 일을 마치고 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하고 쉴 수 있는 ‘우리집’을 갖고 싶어할 따름이야. 호소다 마모루는 그렇게, 현대의 일상을 그린 많은 일본 영화가 천착해온 ‘잇테키마스’(다녀오겠습니다)와 ‘잇테랏샤이’(다녀오세요), 그리고 ‘다다이마’(다녀왔습니다)와 ‘오카에리나사이’(어서 와요)라는 한벌의 괄호로 구획된 정밀(靜謐)한 세계에 도착해.

오직 연결하라

E. M. 포스터가 <하워즈 엔드>에 쓴 유명한 경구, “오직 연결하라”(Only connect)는 호소다 마모루의 영화세계를 요약하는 말도 될 수 있을 거야.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타임리프를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고, 세대를 뛰어넘어 이모와 조카의 첫사랑을 한 가락의 노래로 만들지. 컴퓨터 영재 소년과 아흔살 할머니가 영웅으로 활약하는 <썸머워즈>는 현대 일본을 지배하는 양대 시스템- 전통적 사고방식과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접속시킨 이야기야. <늑대아이>에서 마주보는 건 문명과 자연이야. 하나는 예외적 혈통을 타고난 아이들을 온전히 키우기 위해 인간에 의해 동물들이 쫓겨난 땅으로부터, 동물에게 인간이 밀려난 땅으로 옮겨가는 거야. 하지만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세 식구를 외딴곳까지 데려간 다음에 특수한 질문에 보편적 답을 내기 시작해. “늑대아이들은 대체 어떻게 어른이 되는 걸까?”라는 하나의 절박한 물음은 ‘늑대’를 괄호 치면 기본적으로 모든 엄마의 것이기도 해. 다만 보통 엄마는 터놓고 조언을 구할 수 있을 뿐이지. 모든 부모 눈에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꾸만 으슥해지는 숲과 같으니까. 늑대아이 아메와 유키는 이 영화에서 몬스터가 아니라 혼혈인으로 그려지고 있어.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그러하듯 남매는 물려받은 유산 중 어느 쪽 문화를 본령으로 삼을지 선택하는 셈이지. 그럼 ‘늑대인간’은 그저 메타포로 이용된 것뿐일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현실의 표면을 재료로 삼는 영화에는 오래된 역설이 있어. 구체적이지 않은 메타포는 은유도 서술도 못 되고 흩어져버린다는 까다로운 진실. 지혜로운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늑대의 몸을 가졌기에 닥쳐오는 생활의 세부를 회피하지 않아. 하나와 늑대남자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남자는 늑대의 몸을 하고 있어. 동성애 모티브를 포함한 영화에서 두 남자의 섹스를 영혼을 보여준다는 핑계로 남녀의 모습을 빌려 찍는다거나 노인과 젊은이의 섹스에서 늙은 육체를 마음속 이미지로 대체하는 예를 생각하면 이 선택이 비록 애니메이션이라 해도 자못 용감함을 알 수 있어. 호소다 마모루의 비타협주의는 늑대로 살기를 선택한 아이가 엄마와 이별하는 클라이맥스에서도 분명하지. 제대로 된 작별의 포옹도 없이 엄마를 떠나는 늑대아이는 숲에서 혼절한 엄마를 집까지 데려다주지 않아. 산기슭 주차장 바닥에 내려놓고 돌아서버리지. 그가 갈 수 있는 지점은 이제 거기까지인 거야. 냉랭히 돌아선 아이는 최고의 속도로 산정까지 뛰어오르는 늠름함을 엄마에게 보여주는 행위로 인사를 대신해. 이 시퀀스를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모자지정이 아니라 동물의 감수성이야. 제 몫의 사냥을 할 수 있게 되면 독립된 개체로 흩어져 살아가는 동물 부모와 F1의 방식인 거지. 홀로 남겨진 하나를 보며 나는, 도피 중인 반전운동가 부모가 10대 아들을 세상 속으로 ‘방생’하고 떠나는 <허공에의 질주>의 마지막을 추억했어. 다만, <늑대아이>에서는 보내는 쪽과 떠나는 쪽이 뒤바뀌어있는 거지. 나는 ‘다만’이라고 썼지만 흔한 변주라는 뜻이 아니야. 그러한 같고도 다름을, 보편적 공감대와 특정한 행태를 정확히 연출하는 능력이 때로 영화에서는 모든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머리칼은 살랑살랑, 눈물은 방울방울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은 예스럽고 담백해 보이지만 발상의 전환을 품고 있어. 하나의 마음이 자꾸만 수업에서 마주친 늑대남자를 향해 흘러가는 대목을 볼까? 세탁소에서 일하는 그녀는 손님의 옷을 찾다가 손길을 멈추고, 찌개의 간을 보다가 멍해지고, 책을 읽다 말고 건공중을 바라봐. 어떤 동작을 그리는 연출이 아니라 동작을 멎는 연출로 인물의 마음속에 발생하고 있는 거대한 사건을 표현하는 거야. 흔히 애니메이션의 차별적 장점은 실사로 찍기 힘든 기발한 그림을 구현하는 데에 있다고들 믿지만, 호소다 마모루는 정확히 원하는 타이밍에 정지의 모멘트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애니메이션의 커다란 잠재력임을 가르쳐주고 있어. 그의 연출은 미야자키 하야오나 오토모 가쓰히로보다 지상에 가깝고 다카하다 이사오보다는 과묵하고 냉정해. 호소다 마모루의 인물들은 사랑하더라도 상대에게 생각을 죄다 말하지는 않는 사람들이지. 지브리의 소녀들은 날고 호소다 마모루의 소녀들은 달려. 지브리 캐릭터들의 머리칼은 바람을 머금으면 기구처럼 부풀어 올라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지만 호소다 마모루가 그린 인물의 머리칼은 미풍에 일렁이며 눈빛을 가려. 그는 덜 보여줌으로써 더 많이 이야기하는 종류의 연출자야. 사람이고 동물이고 이목구비를 대담히 생략하는 일이 흔하고 눈의 표정이 아예 보이지 않는 각도의 뒤쪽 측면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시점 숏도 많은데 이상하게도 감정의 진폭은 그런 순간 최고에 달하곤 해. 눈코입이 보이지 않는 인물들이 관객의 머릿속에서 가장 풍부한 표정을 짓는 거야. 이렇게 짐작해 보기도 했어. 호소다 마모루는 그의 인물들이 타인에게 표정을 굳이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이런 식으로 배려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아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듯 그들의 감정에 민감해지고.

<늑대아이>는 집요한 관찰력을 가진 애니메이터가 창출할 수 있는 떨림으로 가득해. 하나와 늑대남자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 잊기 힘든 찰나가 있어.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밤거리의 약속장소로 달려온 하나는 먼저 도착해 있는 남자를 먼발치에서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몸을 숨겨.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애인의 모습을 음미해. 감독은 알고 있는 거야. 정작 만나서 그가 나보다 덜 사랑하는 건 아닐까, 시간은 왜 이리 빨리 갈까 전전긍긍하는 데이트의 시간보다, 함께할 시간의 모래시계가 아직 뒤집히지 않은 상태에서 눈앞에 없는 나를 고대하고 있는 연인을 응시하는 순간이야말로 연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찰나라는 걸. 먹는 장면이 실사와 애니메이션 구분 없이 일본영화의 장기라는 점은 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 일본의 훌륭한 감독들은 하나같이 식탁의 사소한 규범과 음식마다의 뉘앙스가 감정 기복과 대화의 리듬을 조율할 수 있음을 날 때부터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늑대아이>에는 꼬치를 긴 유리컵에 담긴 소스에 찍어 먹는 장면이 있어. 가난한 젊은 커플은 용도에 맞는 식기를 종류별로 갖추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맛있고 행복해.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하나가 꼬치를 똑같은 컵에 담가 먹을 때 그 상차림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지.

<늑대아이>는 많은 지문(地文)을 배경 이미지들에 숨겨둔 애니메이션이야. 곳곳의 복숭아 통조림들은 하나가 앓았던 입덧을 귀띔해주고, 살림에 비해 과다한 책들은 사회를 남들처럼 경험할 수 없었던 늑대남자와 이제 그의 세계에 포함된 하나가 책을 통해 생의 많은 문제를 독학해 나가야 하는 사정을 알려주지. 아이들 끼니를 챙기다가 졸던 하나가 퍼뜩 일어나 떨어진 밥풀을 집어먹는 숏도 놓치지 마. 이보다 ‘엄마’다운 제스처가 또 있을까? 호소다 마모루는 하나가 통과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울음이 아니라 잦은 졸음을 통해 묘사해. 그래. 어린 엄마한테는 울 겨를 따위 없었을 거야.

좋은 애니메이션은 어떤 실사영화보다 엄격한 구도와 시점 숏을 구사하지. 큰비가 내린 날 아침 집에 돌아오지 않은 남편이 늑대의 몸으로 도시의 개천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하나가 발견하는 장면에서 나는 기시감을 느꼈어. <밀양>의 신애(전도연)가 아이의 주검을 보러 간 장면의 카메라가 그랬듯 <늑대아이>의 카메라도 하나에게 차마 다가가지 못해. 게다가 하나는 이 비극을 제 것으로 소유하지조차 못하고 그가 쓰레기차에 던져져 멀어져가는 걸 바라볼 도리밖에 없지. CG가 두드러진 장면이 하나 있어. 네발로 설산을 달리는 아메와 유키, 그리고 허덕이며 뒤따르는 하나의 시점 숏이, 요즘 3D애니메이션의 하이퍼리얼리즘을 멋쩍게 만드는 일격으로 보였다면 내가 너무 심술맞은 걸까? 본능을 발산하는 아이들의 천진한 쾌감은 물론, 궁극적으로 그들과 같은 몸일 수 없는 엄마의 안타까움까지 담은 이 시점 촬영은, 영화에서 실감이란 동일시가 관건이지 관객을 더 고급스런 롤러코스터 승객으로 전환시키는 문제가 아님을 웅변하는 것 같았거든. 애니메이션으로서 <늑대아이>의 연출이 빛난 또 다른 대목은, 아메와 유키가 3, 4년에 걸쳐 경험하는 학교생활을 단숨에 요약해버리는 패닝 롱테이크야. 1학년 교실 뒷자리에서 창밖만 물끄러미 내다보는 남동생을 잡았던 카메라가 옆 2학년 교실로 이동하면 누나 유키가 활발히 발표하고 있지. 다시 아메의 교실로 움직였던 카메라가 2학년 교실 복도로 가면 한살 더 먹은 아메가 동급생의 괴롭힘을 당하고 있고 3학년이 된 누나가 달려와 동생을 보호해. 마침내 4학년 교실로 옮아간 카메라가 여전히 명랑한 유키를 비춘 다음 3학년 교실로 돌아오면 아메의 자리는 비어 있어. 왕복 패닝만으로 남매의 성장과정을 함축한 이 연출은 애니메이션의 경제성과 거기에 수반되는 아름다움을 살린 사례로 장차 누군가에게 인용될 테지.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여자를 만난다면

“사람들을 피해서 왔는데 결국 마을 사람들에게 온통 신세지고 말았네.” 늑대인간이란 존재를 구성원으로 고려할 수 없는 시스템과 군중의 시선을 피해 산속으로 이사한 하나는 우여곡절 끝에 생활이 안정됐을 때 그렇게 혼잣말을 해. 한편 하나네 집에 마실 온 동네 어른들은 잡담 끝에 “배수도 안 좋고… 여긴 살기 좋은 곳이 아니야. 그러니까 서로 돕고 살아야지”라고 이야기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와 “서로 돕고 살아야지” 사이에 태연스럽게 놓인 ‘그러니까’라는 접속사에 나는 흠칫했어. 그리고 잠시 뒤엔 내가 놀랐다는 사실에 놀랐어. 무심히 스쳐가는 듯한 이 대사들을 들여다보게 되는 까닭은, 그들의 메시지가 성장과 양육의 드라마라는 <늑대아이>의 표면 아래 복류하는 감독의 여일한 세계관으로 보이기 때문이야.

인물이 아무리 정상에서 멀리 벗어난 조건과 초현실적인 상황에 처해 있을 경우에도 호소다 마모루의 프레임 안에는 바깥세계가, 사회와 자연이 어느새 흘러들어와 있어. 대사? 문장으로 공표한 적은 없지.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스토리 진전과 직접 관련이 없는, 어쩌면 잡음 같고 잔털 같은 디테일로 우리를 느릿느릿 설득해.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고, 아니 혼자이기 불가능하다고. 하나가 무너져가는 산속 집을 수리하고 청소하는 시퀀스를 보자. 분주히 치우고 고치는 와중에도 그녀는 간유리에 돋을새김된 단풍잎 문양을, 개수대에 박힌 색색 차돌을 쓰다듬어봐. 기둥에 새겨진 키재기 금을 더듬고 유메와 아키를 세워보기도 해. 고립을 원해서 멀리 왔지만 처음부터 하나와 아이들은 오래전 같은 집에 먼저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과 동거하는 거야. 영화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 처음 만난 날 하나가 늑대남자를 쫓아가 교과서를 빌려주겠다고 교문에서 제안할 때 둘 옆으로는 뚜렷한 역할 없이 자전거를 탄 두 학생이 지나가. 하지만 덕분에 늑대남자와 하나는 방금 나눈 대화의 의미를 잠시 저울질할 몇초를 가져. 늑대남자가 여자친구 하나에게 비밀을 고백하려고 최초로 시도한 밤, 그들은 철책 두칸의 거리를 두고 다리 위를 걷고 있어.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하나가 돌아섰을 때 둘 사이에는 택시 한대와 승합차 한대가 지나가는 시간만큼의 침묵이 흐르지. 그리고 남자는 고백을 미뤄. 하나의 딸 유키가 전학 온 소년 앞에서 늑대의 발톱을 노출하는 위기의 순간에 호소다 마모루는 그 자리에 영문 모르고 날아든 노란 나비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 연출자야. 요컨대 가장 내밀한 순간에도 호소다 마모루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세상 속에 있어.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철도 건널목이 기억나니? 거기서 시간은 항상 그 안에서 생활하고 교차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계량됐지. 너, 설마 타임리프를 표시한 디지털시계 계기판을 일일이 읽고 있진 않았지? <늑대아이>에서도 하나가 애인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의 경과는 줄어드는 행인으로 가늠되고 그녀가 시골로 옮긴 다음에는 자연이 시계 역할을 이어받아. 산과 하늘을 채색한 톤에 따라. 대기 중에 차오른 보라색의 함량으로 미루어 극중 시각이 몇시쯤인지 추측하는 건 <늑대아이>를 보는 즐거움 중 하나란다.

<늑대아이>를 보는 동안 나는 영화가 영원히 계속되길 바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기분을 안은 채 어서 내 현실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어. 내가 살면서 통과한 일들을 환기시켰기 때문에 영화가 더 아름답다고 느꼈고 이 영화의 어떤 신들 때문에 앞으로 살면서 마주할 어떤 체험들이 더 풍요로워지리라는 걸 예감했어. 비 내리는 아침 이유도 말하지 않고 아스팔트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면 이제 나는 캐묻지 않고 우산을 씌워주게 될 거야. 사랑하는 늑대남자를 잃은 날 하나에게, 생면부지의 지나가는 아저씨가 그래주었듯이. 그것이 이 영화가 내게 남긴 흔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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