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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융합’에 관하여
진중권(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2-11-16

기술과 예술

삼성과 애플이 국제적으로 특허 소송을 벌이고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삼성이 ‘애플’이라는 회사의 견제를 받을 만큼 시장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했음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어떤 측면에서는 여전히 애플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각국에서 진행 중인 이 복잡한 소송의 결말을 아직 알 수 없다. 아무튼 삼성은 애플쪽이 자신의 기술특허를 침해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애플은 삼성쪽이 자신의 디자인 특허를 침해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안다.

삼성과 애플 소송의 쟁점

이 소송은 경제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삼성과 애플의 대결은 한마디로 ‘기술’과 ‘예술’의 대결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삼성은 지난해 4월 서울지방법원에 낸 5건의 소장에서 애플쪽이 고속 패킷 전송 방식 통신표준 기술, 광대역 부호 다중 분할 접속 기술, 테더링 관련 기술 등의 기술특허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애플은 두달 뒤에 같은 법원에 낸 소장에서 삼성이 갤럭시 시리즈의 제품에서 디자인 특허와 실용 특허, 그리고 애플의 트레이드 드레스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이 소송은 기술과 예술이 서로 융합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알력으로 볼 수 있다. 가령 천하의 애플도 자신들이 삼성의 기술을 갖다썼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삼성전자가 2003년에 채택한 기술 표준이 현재까지도 유효한지 살펴봐야 하며, 기술 표준 전체가 삼성전자의 특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반박할 뿐이다. 반면 삼성도 애플이 주장하는 디자인 특허에 대해 비슷한 논리를 들이댈 것이다. 사실 휴대폰이나 태블릿의 모양이야 어차피 거기서 거기, 만들다 보면 비슷해질 수밖에 없잖은가.

미국의 법원은 애플의 손을 들어주었다. 반면, 유럽에서는 삼성에 유리한 판결이 나오고 있다. “전통적으로 유럽은 특허권 주장에 대해 매우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에 “웬만한 특허를 내세워 가처분 소송을 걸거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란다. 삼성과 애플이 원수처럼 싸우는 것처럼 보여도, 기술과 예술은 어차피 서로 융합해야 한다. 이 문제를 다룬 세미나에 참가한 어느 일본 학자의 말이다. “소송은 협력의 시작이며 (삼성과 애플은) 갈등 속에서 해법을 찾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 갈등에서 삼성의 패러다임이 애플에 비해 한 세대 뒤처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요즘 기업들 사이에서 기술의 격차는 고작 몇 개월 차이인 경우가 허다하다. 기술경쟁은 이른바 ‘레드오션’이다. 이런 상황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요인은 역시 빌렘 플루서가 말한 ‘기술적 상상력’, 기술과 예술의 융합이다. 여기가 바로 ‘블루 오션’이다. 적어도 푸른 바다에서 삼성은 애플을 따라가기에 바쁘다. 삼성이 애플의 카피캣(copycat)임은 시각적으로 확인된다. 디자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광고 사진까지 유사하다.

물론 이는 단지 시각 디자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삼성과 애플은 IT 산업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 보인다. 가령 애플쪽이 미국의 법원에 증거로 제출했다는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전직 삼성 직원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드웨어를 파는데, 이건 팔아도 AS 등 비용이 발생한다. 그 시간에 애플은 소프트웨어를 팔아 앱 스토어를 열고, 평생 고객을 확보한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담겨 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극장에서 봤던 삼성 앱스토어 광고가 떠오른다. 한마디로 영업의 소프트웨어까지 베낀 셈이다.

삼성은 내부에 아예 부서까지 차려놓고 애플의 디자인과 소프트웨어를 베껴왔다고 한다. 타사의 신제품이 출시되면 그것을 사다가 다시 조립해가며 유사품을 제조하는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을 해왔다는 얘기다. 삼성은 경제가 ‘기술적 혁신’을 통해 발전하던 시대의 끝에 가 있다. 거기서 경제가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발전하는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는 것이다. “삼성이 ‘제품’을 판다면, 애플은 ‘문화’를 판다.” 두 기업 사이에는 패러다임의 차이가 존재한다.

합리적 선택

이는 물론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 자체의 한계라 할 수 있다. 기술적 상상력, 즉 기술과 예술의 융합이 어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겠는가. 그것은 사회가 문화로 뒷받침해줘야 할 부분이다. 수많은 연구, 창작, 실험, 비평,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수많은 시행착오들. 그 시간과 비용을 사회가 기꺼이 감당해줘야 하는데, 알다시피 한국사회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기술에 투자한 것은 곧바로 회수가 되지만, 문화적 저변에 투자하는 것은 회수 기간이 길며, 아니 회수가 될지조차 불투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삼성의 선택은 나름대로 합리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장의 환경은 이미 제품을 문화와 예술로 소비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러는 사이에 삼성은 이미 기술에 의존해 갈 수 있는 극한에 도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경제적인 선택은 역시 적은 비용으로 높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리버스 엔지니어링’이리라. 그게 돈도 적게 들고 효과도 빠르다. 입장을 바꾸어 자신이 기업주라고 생각해보라. 과연 회수가 불분명한 곳에 투자를 하겠는가? 문제는, 그러다가는 영원히 그 짓만 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몇년 전 이탈리아까지 가서 ‘디자인 선언’까지 하고, SADI와 같은 학교를 운영하는 것을 보면, 삼성도 디자인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기업의 디자인이라면 그저 세계적으로 잘나가는 디자이너를 고액의 연봉으로 모셔오는 수준을 넘어야 한다. ‘디자인 인격’이라고 해야 할까? 가령 ‘포르셰’나 ‘메르세데스’, ‘애플’ 하면 떠오르는 고유한 디자인의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삼성’ 하면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 한마디로 디자인이 철학으로 뒷받침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융합의 시대

이제까지 산업은 ‘전문화’를 통해 발전해왔다. 매뉴팩처의 단순분업에서 산업혁명기의 공장제분업을 거쳐, 오늘날엔 바로 옆 분야와도 소통이 힘들 정도로 전문화가 고도화됐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산업이후(post-industria) 단계에 접어들면서, 이 종적인 경향에 횡적인 경향이 결합하기 시작한다. 제 분야에 대한 ‘깊은’ 전문적 지식을 다른 분야에 대한 ‘넓은’ 지식과 결합하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그런 능력을 갖춘 이를 경영학에서는 ‘T자형 인재’라 부르는 모양이다.

뇌 과학에 따르면, 인간이 창의적인 작업을 할 때, 뇌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 평소에 서로 연결되지 않는 부위들이 갑작스레 연결되는 현상이 관찰된다고 한다. 이는 2500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얘기와도 일치한다. 그는 시에서 운율을 짓는 기술은 가르칠 수는 있으나, 은유를 만드는 기술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한다. 은유란 서로 다른 두 사물 사이에 불현듯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때 그 두 사물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효과가 크다고 한다.

고등과학원에서도 최근 ‘융합학문’에 관한 심포지엄을 시작했고,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유력 대선주자로 떠올랐다. 4년 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통섭’의 시도는 불행히도 완장을 차고 나타난 어느 교양 없는 장관의 명령으로 중단됐다. 당시 그들은 ‘전문화’의 중요성을 떠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문화계 서북청년단의 정권은 전공이 삽질과 공구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