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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의 아주 사적인 클래식] 마음의 영화 한편

<그대에게 가는 먼 길>, 이수유, 2011년

<그대에게 가는 먼 길>

<그대에게 가는 먼 길>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에게 ‘지역영화’라는 말을 건네면 보통 거부의 의사를 표시한다. 처음에는 그런 반응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들과 거듭 만나면서 이유를 알게 됐다. 지역영화를 지방영화로 취급하는 문화, 달갑지 않은 건 당연했다. 이런 일도 있다. 한국에서 열리는 수많은 영화제에는 단편영화 섹션이 있다. 출품작의 다수는 영화를 전공한 학생들의 작품인데, 서울과 근교의 일부 학교에서 나온 작품이 그중 대부분을 차지한다. 다른 지역 영화학과 학생들의 영화는 다 어디로 가는 걸까. 물어보니 학생들이 아예 출품을 꺼린다고 한다. 서울과 기타 지역 사이의 장벽은 영화판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근래 주목한 감독 가운데 몇은 지방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제주, 부산, 전주에서 작업하는 오멸, 김지곤, 함경록이 그들이다. 그들이 신작을 내놓을 때마다 내 믿음은 확신으로 변한다. 예를 들어,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 예심에서 김지곤의 <할매>를 본 순간, 내 아들이 과거에 급제한 것처럼 자랑하고 싶었다. 지난 9월, 오멸이 <지슬>의 기술시사에 초대했을 때는 더했다. 그의 영화는 가랑이가 찢어지게 따라가도 못 미칠 곳에 도달해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지역 바깥으로 걸음을 옮겨 문을 두드린 데 있다. 만약 그들이 지역 안에 영화를 묻어뒀다면? 그들의 영화를 보는 기쁨 또한 사라졌을 거 아닌가.

그렇게 모르고 살았을 감독 중에 이수유라는 자를 소개한다. 따로 사진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녀가 여자감독인 것도 몰랐을 것이다. 지난해 전북독립영화제에서 그녀의 단편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보았다. 전북독립영화제는 또 뭐냐고? 전북과 부산, 대전의 독립영화협회는 나란히 10년이 넘도록 독립영화제를 열어왔다. <씨네21>을 포함해 주요 매체 중 누구도 따로 페이지를 할애해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다. 그러니 참가한 사람들도 소박한 모습이고, 영화제의 분위기도 이름난 것들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전북 화동마을에서 지역주민과 지낸 시간을 영화에 담은 이수유의 태도에도 별 욕심 같은 건 없다(그런 까닭에 바깥 사람들은 마음의 영화 한편을 만날 기회를 놓친 셈이다).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은 노모와 사는 나이 든 아들의 이야기다.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은 어울려 지내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은 갈대와 바람과 비와 꽃과 논과 도랑의 이야기다. 어느 날, 깨끗하게 단장한 어머니가 길을 떠나고, 화투판에서 돈을 잃은 아들은 뒤늦게 어머니의 자취를 더듬는다. 시골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은 말그레한 자연과 능청스러운 인위 사이의 널뛰기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시간을 재우고 마음으로 채운 롱테이크가 빛난다. 슬픔이 넘쳐흐르는 틈을 타 응어리진 꽃송이를 흘려보내고 싶을 때 생각남직한 영화다. 내일, 올해 전북독립영화제로 향할 예정이다. 관계의 정치와 줄지은 술자리 탓에 피곤한 거대 영화제보다 이 영화제에 발길을 더 재촉하는 이유는 별거 아니다. 영화 몇편과 만남 몇과 이야기의 자리, 가을날에 그거면 족한 것을. 게다가 벗이 이번 길에 동참하겠다고 나섰다. 더 바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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