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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진중권(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2-11-23

회복과 전환

체 게바라의 얼굴을 티셔츠 위에서 보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리라. 장관 자리를 내던지고 게릴라로 돌아간 게바라는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혁명의 화신이자, 젊은 날 가슴 뛰는 정의감의 분신이었다. 이 혁명의 아이콘이 어느새 그가 그토록 증오했던 자본주의 상품경제에 포섭되어 소비의 아이템이 되어버렸다. 그의 얼굴을 걸치고 다니는 이들은 그가 볼리비아의 산속에서 겪었던 굶주림을 알까? 그리고 고립된 자의 고독, 쫓기는 자의 공포, 가망없는 저항에 대한 회의를 가늠이라도 하는 걸까?

복구

1960년대에 유럽의 상황주의자들은 이런 현상을 ‘회복’(recuperation)이라 불렀다. ‘회복’이란 한마디로 체제의 궤도에서 벗어난 정치적 일탈들을 바로잡아 원위치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위키피디아는 ‘회복’을 이렇게 정의한다.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사상이나 형상이 미디어 문화와 부르주아 사회 내에서 뒤틀리고, 포섭되고, 흡수되고, 병합되고, 상품화되어, 중립화하고, 무해하고, 사회적으로 좀더 관습적인 시각으로 해석되는 과정.” 회복의 과정을 통해 체 게바라는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사살당한 셈이다.

좀더 넓은 의미에서 ‘회복’은 “그 어떤 전복적인 작품이나 사상이라도 주류와 공식문화에 의해 문화적으로 전유되고 마는 현상”을 가리킬 수도 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바로 아방가르드 예술의 운명이다. 한때 부르주아 문화에 충격을 던져주었던 아방가르드 예술도 오늘날 자기들이 그토록 싫어하던 그 문화의 아이콘이 되어 미술관 안에서 온갖 영예를 누리고 있다. 가령 ‘예술문화’ 자체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비판이었던 뒤샹의 변기. 오늘날 그것은 20세기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회복’이란 몇몇 작가에게나 해당되는 예외적 상황이 아니라, 실은 모든 작가에게 해당되는 일반적 상태다. 오늘날 ‘일탈’은 아예 예술의 규칙이 되어버렸다. ‘일탈’하지 않는 예술은 이제 예술로 인정받지 못한다. ‘전복’의 악덕도 더이상 이 사회를 놀라게 하지 못한다. 전복은 외려 부르주아 예술문화에 의해 적극 권장되는 미덕으로 전화한 지 오래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가령 80년대에 체제에 위협적으로 느껴져 철거되곤 했던 민중미술의 주요한 컬렉터는 민중이 아니라 강남의 부유층이다.

학술계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에 한국을 방문한 슬라보예 지젝은 어느 의류업체로부터 후원을 받았고, 그 업체는 당연히 이 행사를 기업홍보에 활용했다. 이게 몇몇 좌파들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그들은 주최쪽이 지젝마저 체제 내화한 것이 아니냐고 항의했다. 하지만 설사 지젝이 제 돈을 들여 이 땅에 왔다고 해서 상황이 어디 달라지겠는가? 그의 강연회에 모인 수백명의 청중이 과연 체 게바라 티셔츠를 걸치고 길거리를 나다니는 사람들과 얼마나 다를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전환

개인적으로 경험한 가장 황당한 ‘복구’의 예는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훈데르트바서의 인용문이 대중에게 전유된 방식이었다. “나 혼자 꿈을 꾸면, 그것은 한갓 꿈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새로운 현실의 출발이 된다.” 나는 이 언급을 나의 책 <미학오디세이>에 책 전체의 취지를 요약한 모토로 사용한 바 있다. 대중은 이 말을 엉뚱하게 황우석 박사를 옹호하는 데에 사용했다. 우리 모두가 줄기세포가 있다고 꿈을 꾸면, 없던 줄기세포가 생기는 새로운 현실이 열린다?

‘복구’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저 전복적 가치와 혁명적 정신의 상실을 한탄하는 데에 그치는 것을 넘어서 그에 맞설 ‘대응전략’을 생각하는 게 더 생산적이리라. 그리하여 상황주의자들은 ‘복구’의 경향에 ‘전환’(détournement)이라는 전략으로 맞선다. ‘전환’은 ‘복구’의 과정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다시 말해 그 자체로서는 결코 전복적이지 않은 지배문화의 요소를 슬쩍 전복적, 혁명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바꾸어놓는 것이다.

사실 지젝의 철학은 적어도 국가에서 입국을 거절하거나 자본주의 기업에서 후원을 거절할 만큼 위험하지는 않다. 정작 체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어느 대학 강사가 G20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려넣었을 때, 정권은 체제가 무너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이 퍼포먼스는 제대로 상황주의적이다. 강사는 체제를 홍보하는 포스터에 쥐의 이미지를 첨가함으로써 슬쩍 포스터의 기능을 뒤집어버렸다. 전형적인 상황주의적 ‘전환’의 전략이다. 기능전환

상황주의적 ‘전환’의 효시는 브레히트가 말한 ‘기능전환’(Umfunktionierung)이 아닐까? ‘생산자로서 작가’라는 글에서 베냐민은 이 브레히트의 개념을 이렇게 정의한다. “진보적 지식인, 즉 생산수단을 해방시켜 계급투쟁에 복무하는 이가 원하는 방식으로 생산의 형식과 도구를 변형시키는 것.” 그는 “생산수단의 단순한 제공과 생산기구의 변형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생산도구 자체를 변형시키지 않을 경우, 소재가 제아무리 혁명적이더라도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부르주아의 생산 및 출판기구는 제 계급의 이해를 유지하면서 수많은 혁명적 주제들을 동화할 수 있다. 가령 “즉물적 사진은 르포르타주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비참한 생활까지도 완벽하게 유행적 방식으로 파악하여 즐거움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는 상황주의에서 말하는 ‘회복’의 상황이다. 때문에 예술적, 문학적 생산수단의 기능전환이 요구된다. 브레히트는 영화, 라디오와 같은 대중매체들을 응용하고 배워, 연극의 기능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지 않았던가. 상황주의자들이라면 이를 ‘전환’이라 부를 거다.

상황주의와 브레히트의 유사성은 계속된다. “서사극은 줄거리를 전개시키기보다는 상황을 묘사한다. 그 효과는 줄거리의 중단을 통해 발생하는데, 그것은 영화나 라디오, 신문이나 사진의 기법을 수용한 것이다. 몽타주된 것은 문맥을 중단시킨다. 줄거리의 중단이 끊임없이 관객 사이에서 환영을 제거해준다. 서사극은 상황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발견하게 만든다.”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지 않은가?

물론 상황주의와 브레히트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노동자가 아직 궁핍한 생산자였던 시절과 노동자가 이미 풍요한 소비자인 시절의 자본주의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상황주의자들은- 이를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브레히트가 고안하고 베냐민이 발전시킨 ‘기능전환’의 전략을, 본질적으로 변화한 자본주의의 조건에 맞게 재창조한 셈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위기에 처한 시대에 상황주의는 거의 유일하게 “소비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문화정치학”을 제공했다.

디지털 시대에 ‘전환’은 차라리 일상이 되었다. 오늘날 대중은 자본주의가 제공한 도구의 수동적 ‘소비자’에 머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디지털기기를 사용해 직접 메시지의 ‘생산자’가 되려 한다. 낮은 수준에서는 기업이나 정치의 광고를 패러디하는 것에서부터, 높은 수준에서는 소비를 위해 제공된 노트북과 무선 인터넷으로 정치적 시위를 매개하는 것까지, ‘전환’은 다양한 수준에서 일어나고 있다. 다만, 과거와 달리 그것의 주체가 소수의 지식인에서 다수의 대중으로 바뀌어버린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