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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되어 돌아오리라
2001-03-13

<호타루> 촬영현장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긴 겨울옷을 벗기려는 듯 내리쬐는 햇살이 따사로운 안동 하회마을. 한 남자가 단추를 목까지 채우고 깃을 세운 겨울외투에 싸여 서 있다. 꽤 더울 텐데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선 절도있는 폼이나, 두툼한 겨울외투가 어딘지 낯익은 그는 사실 <철도원>의 호로마이 역장 다카쿠라 겐이다. 눈덮인 역을 고집스러우리만치 성실하게 지키며 딸과 아내를 떠나보내 관객을 울렸던 그가, 신작 <호타루>에서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아내와 마지막 여행에 나선다. <호타루>는 다카쿠라 겐,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을 비롯한 <철도원>의 제작진과 제작사 도에이가 다시 의기투합한 일본영화. 아내의 죽음을 앞두고 함께한 인생역정을 돌아보는 노부부의 여행과 과묵한 사랑이야기를 그린다.

노부부의 여정이 하회마을에까지 이른 것은, 그들의 과거사에 조선인 전우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 태평양전쟁에 특공대로 끌려왔다가 전사한 옛 전우의 유언을 전하고자 한국의 유가족을 찾아가는 장면을 위해 한국 현지촬영을 하게 됐다. 2월22일부터 27일까지 6일간 진행되는 촬영 첫날, 전통 농가가 잘 보존된 하회마을의 골목에서 리허설이 열렸다. 2대의 카메라가 돌아가고, 부부역의 두 일본배우, 유가족을 맡은 한국배우들, 한·일 양국의 스탭 및 취재진들이 모인 촬영장은 매우 붐볐다. 촬영중에는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다카쿠라 겐은 카메라 밖에선 거의 말이 없었지만, 전우의 유언을 전하는 장면에선 대사와 함께 묵직한 저음으로 <아리랑>을 들려주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철도원>을 많이 봤다고 들었다”는 후루하타 감독은 <호타루>로 더 관객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길 바란다고. 현재 90% 이상 촬영을 끝낸 <호타루>는 올 5월 이후에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감독 후루하타 야스오 인터뷰

왜 안동 하회마을을 무대로 삼게 됐나.

하회마을은 한국에서도 옛 농촌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집이 많아서 보통 마을과 너무 달라 좀 이상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곳의 느낌이 좋았다. 내가 어렸을 때 자란 농촌과 비슷하기도 하고.

‘반딧불’(호타루)이란 제목이 의미하는 건?

전쟁중에 죽은 특공대 병사들의 묘비 가운데, 내가 출전해서 죽더라도 반딧불이 되어 돌아오겠다는 말이 새겨진 것이 있었다. 그들이 자주 가던 술집 아줌마들에게 그런 말을 남기곤 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이 영화에서는 전사한 한국인이 반딧불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다는, 어떤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세상에 뭔가를 남기고 싶지만 남기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그들이 남기지 못한 것들을 영화에 담고 싶었다.

촬영 전부터 일본에서 많은 화제를 모으고 있다는데.

아무래도 영화에 많이 나오지 않는 다카구라 겐이 <철도원>에 이어 별 휴지기 없이 1년 만에 출연한다는 사실이 관심을 끌었을 테고, 특공대(가미가제)라는 소재가 20세기 역사의 부끄러운 사실을 환기시키기 때문 아닐까.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를 풀어가기가 조심스러울 것 같은데, 어떤 입장을 갖고 있나.

양국이 굉장히 불행한 과거를 가진 건 사실이다. 그걸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하고. 이 영화의 테마에도 그런 생각이 포함돼 있다. 전쟁으로 목숨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던 건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 일본 병사들의 고통과, 조선인으로 특공대에 온 한국인들의 괴로움을 함께 담아보고 싶다.

글 황혜림 기자 blauex@hani.co.kr·사진 오계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