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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비 거품의 시대
2002-01-30

심재명/ 명필름 대표 shim@myungfilm.com

최근, 올해 제작할 영화의 제작비를 뽑았다. 제작실장이 준 예산서를 보니 순수 제작비가 37억원이었다. 뭐라? 37억원? 특수효과 현란한 SF물도 아닌, 삿갓 쓰고 도포 입고 짚신 신었던 사람들 이야기가 이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감?

문제는 오픈세트를 짓는 것과 ‘보이지 않는’ 컴퓨터그래픽 작업에만 13억원 정도가 책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연기자들의 개런티 상승과, 스탭들의 인건비 인상도 큰 몫을 하긴 했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책상에 앉아 제작비 예산서를 노려보았다. 100년 전을 살았던, 누구보다 먼저 ‘새로운’ 것에 경도됐던 사람들을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리고자 하는 이 이야기를 제대로 구현하는 데 규모나 형식에 대해 얼마만큼 투자해야 맞는 것일까? 그 정답은?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순수 제작비 60억원이네, 100억원 육박이네 하면서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제작투자 계약서에 손이 떨리고, 심장이 뛰어 사인도 제대로 못했을 천문학적 숫자에 대해, 이제 어느덧 그 정도쯤이야 하는 심정으로 둔감해진 것이 사실 요즘의 제작 풍토이다. 천문학적인 숫자의 제작비에 OK 사인을 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물론 최근 한국영화의 경이적인 관객동원력에 있다. 여기서 ‘천문학적인’, ‘경이적인’이란 단어를 얘기하는 걸 할리우드 영화인들이 들으면 코웃음치겠지만….

그러나 문제는, 제작비 규모와 흥행결과가 정비례하냐면 꼭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지난해 서울 100만명을 넘긴 6편의 영화들 면면을 살펴보면 제작비 규모보다는, 야무진 마케팅과 코어 타깃을 향한 영악한 컨셉을 유지한, 말 그대로 기획영화의 성격이 강하다. 현재 한국영화계는, 비디오 시장이 상대적으로 많이 위축되고 해외 판권이나 기타 부가 판권의 수요 창출이 그럭저럭인 상태에서, 유달리 영화 유통/배급의 쇼윈도격인 극장 개봉과 거기에 따른 극장 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어떤 영화가 수익을 내느냐 손해를 보느냐는 수익모델의 1차 창구인 극장 흥행으로 결판나는 식이다.

그야말로 위험한 도박인 셈이다. <쉬리>가 20억원 가까운 제작비를 들인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은 그 제작비의 크기에 일단 놀라워했다. <공동경비구역 JSA> 때는 투자사쪽에서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25억원 미만으로 제작예산을 집행해 달라고 했었다. 결과적으로 영진위 현물지원과 예비비 10%를 다 쓰고 조금 더 오버해 약 29억원의 순수제작비를 쓴 바 있다. 촬영이 한참 진행된 뒤에,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의 손익분기점이 얼마냐고 제작사에 물어봐, 자못 심각한 목소리로 ‘서울 50만명인데요…’라고 응대했더니, 허걱, 땀을 흘렸던 그 표정이 엊그제 같다.

숫자 불감증! 왜 1억원이 더 필요한지, 10억원이 더 소요되는지 꼼꼼히 따져볼 일이다.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쓰고, 제대로 운용할 것인지 머리를 싸매고 박터지게 고민할 일이다. 많이 벌면, 허술한 과정은 용서돼도 되는 걸까.

<YMCA야구단>이란 영화에 얼마의 돈을 들여 만들 것인가. 다시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고민해야겠다. 모 감독이 그랬다지. 내겐 제작비 7억원이나 70억원이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이 거품의 시대에, 나라도 하이타이 더 풀지 말고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하이타이 많이 풀었다고, 빨래가 깨끗해지나. 물론 아니지! 적정량을 정확히 풀어야 뽀얀 빨래가 되지. 환경오염도 덜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