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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미학에세이] 익사한 사내
진중권(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2-12-28

예술이냐 기록이냐

1839년 루이 다게르가 최초의 사진인 <다게로타이프>를 대중에게 공개한다. 그 이듬해에 또 다른 선구자인 이폴리트 바야르는 익사한 사내의 시체를 찍은 사진을 발표한다. 그 사내는 바야르 자신이었다. 바야르는 다게르와 비슷한 시기에, 하지만 다게르와 다른 방식으로 사진을 발명했다. 하지만 학술원 회원인 아라고로부터 발표를 늦춰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것을 들어주었다가 다게르에게 선수를 빼앗겨버렸다. 아라고는 다게르와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바야르는 자신을 익사한 시체로 연출한 사진을 찍은 뒤 그 뒷면에 이렇게 적었다.

“당신이 여기서 보는 시체는 무슈 바야르, 즉 당신이 보는 사진을 발명한 이의 시체입니다. 내가 아는 한 이 불굴의 실험자는 약 3년 동안 발견에 몰두해왔습니다. 정부는 오직 다게르에게만 너무 관대했고 바야르를 위해서는 해줄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이 불쌍한 사람은 스스로 물에 몸을 던졌지요. 오, 인간 삶의 알 수 없음이여…! 며칠 동안 시체 안치소에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아무도 그의 사체를 찾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 악취를 피하려면 그냥 지나쳐가는 게 좋을 겁니다. 보다시피 이 신사의 얼굴과 손은 썩어들어가기 시작했으니까요.”

사진의 두 얼굴

바야르는 사진의 또 다른 ‘성격’을 보여주었다. 즉 사진은 진리를 말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허위를 말하는 수단일 수 있다는 것이다. 거짓말은 표제로만 하는 게 아니다. “신사의 얼굴과 손은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거짓말은 사진 속의 어둡게 변색한 얼굴과 손의 지원을 받는다. 여기서 표제와 사진은 공모를 한다. 사진이 허구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때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사진의 ‘기능’이었다. 바야르의 사진은 사실의 ‘객관적 기록’이 아니라 작가의 ‘주관적 표현’이었다. ‘사진의 발명자’라는 타이틀은 다게르에게 빼앗겼지만, 이 한장의 사진으로 바야르는 ‘예술사진의 발명자’가 된 셈이다.

바야르의 일화는 사진의 야누스적 면모를 보여준다. 하나의 얼굴은 1839년 프랑스 학술원에서 다게르의 발명을 공표하는 아라고의 연설 속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 그는 무엇보다도 이 발명품의 과학적 용도를 강조한다. 즉 사진은 천문학, 물리학, 측광(photometry)의 유용한 수단이며, 앞으로 자연탐구의 다른 영역에서도 이제까지 보지 못한 세계를 보여주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진은 객관적 진리를 말하는 과학의 수단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이듬해에 사진은 바야르의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1840)을 통해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바야르의 사진은 사실상 작가가 사회를 향해 발언하는 표현매체로 기능한다. 여기서 사진은 예술의 장르다.

이처럼 사진은 이중성을 갖고 있어 “예술(art)과 기록(document)을 모두 생산”할 수 있다. 하지만 19세기 사람들은 이 두 방향 중 어느 쪽이 매체의 진정한 기능인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에서 사진의 기록적 기능에 만족할 수 없었던 일군의 작가들은 19세기 말 ‘픽토리얼리즘’(pictorialism)이라는, 회화를 닮은 사진의 유형을 만들어낸다. ‘픽토리얼리즘’이라는 낱말의 엄밀한 정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말의 외연도 확정되어 있지 않으나, 대략 그것을 ‘단순한 기록의 필요를 넘어 작가의 예술적 관념을 표현하는 사진의 양식’이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회화와 사진을 병행하다

전형적 픽토리얼리즘 사진은 선명하지 않은 윤곽에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분위기를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종종 ‘인상주의 사진’이라고도 불린다. 이미 1853년에 영국의 미니어처 화가 윌리엄 존 뉴턴(William John Newton: 1785~1869)은 렌즈의 초점을 살짝 흐리는 것만으로 그림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초점을 흐리거나 혹은 노출을 살짝 늘리면, 사진의 고유한 특성인 윤곽의 날카로움이 사라져 사진에 마치 붓으로 터치한 듯한 효과가 발생한다. 회화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아예 감광물질을 바른 울퉁불퉁한 화면에 직접 인화함으로써 캔버스 효과를 흉내내는 경우도 있었다.

픽토리얼리즘의 작가들은 세트를 갖춘 스튜디오 안에서 모델의 연출된 포즈를 촬영하곤 했다. 제재의 선택, 인물의 포즈, 화면의 구도 등 모든 면에서 그들의 사진은 고전회화를 지배하던 미적 규약에 따라 제작되었다. 그것들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환상’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화가들이 화면 위의 모든 요소를 미적 구성의 원리에 따라 배치했듯이, 픽토리얼리즘 작가들은 구성에 어긋나는 요소는 지우기도 하고, 구성상 허전한 부분은 다른 필름에서 오려온 이미지로 채우기도 했다. 이는 화가들이 늘 캔버스 위에서 붓을 들고 해왔던 작업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제 그 일을 네거티브 위에서 한다는 것뿐이다.

픽토리얼리즘 사진은 언뜻 보면 회화를 복제한 석판화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사진과 회화 사이의 이 친화성은 두개의 근원을 갖는다. 쿠르베, 마네, 드가 등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진을 드로잉에 활용해왔다. 이들을 통해 카메라의 시각은 이미 회화 속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다른 한편, 구스타프 레일랜더, 게투르드 케제비어, 에드워드 슈타이헨 등 상당수의 픽토리얼리스트들은 전직 화가이거나, 회화와 사진을 병행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자연스레 사진이라는 뉴미디어의 미학을 자신들에게 익숙한 올드 미디어, 즉 회화의 모범에 따라 구축하게 된다.

회화가 사진을 따라하는 시대에

당시만 해도 사진술은 아직 광학, 화학, 미학을 아우르는 식견을 가진 엘리트의 영역이었다. 픽토리얼리스트들이 사진을 ‘예술’로 끌어올리려 한 것은 그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1888년 휴대용 코닥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합니다.” 이렇게 전문적 지식이 없어도 버튼을 누를 힘만 있으면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자, 시중에는 예술적 훈련을 받지 않은 대중이 찍은 이른바 ‘나쁜’ 사진들이 흘러넘치기 시작한다. 그로써 사진은 더이상 ‘소수의 엘리트들이 제작한 작품으로서 영상’이라는 관념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이제 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발견한 장면을 찍는 ‘스트레이트 포토’(straight photo)가 사진의 대표 형식으로 자리잡는다. 휴대용 카메라로 찍은 것은 더이상 예술사진일 수 없다. 연출되지 않은 실제의 상황을 찍으려면 촬영은 ‘스냅숏’(snap shot)이 되어야 한다. 갑작스레 찍는 바람에 초점이 맞지 않거나 구성이 어긋난 ‘배드 크롭’(bad crop)에서 예술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른 한편, 기자들이 휴대용 카메라로 찍은 생생한 현장의 사진은 신문이나 잡지 등 인쇄매체를 통해 대량으로 복제, 배포된다. 이로써 사진의 성격이 본질적으로 변한다.

분명해진 것은 사진이 무엇보다도 현실의 ‘기록’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때부터 사진도 자신이 ‘예술이 아니라 기술’이라는 매체적 자의식을 가지고 구매체인 회화를 따라가는 데서 벗어나 회화와 구별되는 저만의 고유성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이제 사진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실’과 ‘사실’을 추구하는 매체로 여겨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점에 일어난 묘한 관계의 역전이다. 이제까지는 사진이 회화를 모방했다면, 이제는 거꾸로 회화가 사진을 따라하기 시작한다. 베냐민의 유명한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이렇게 복제와 원본의 관계가 역전된 상황의 이론적 반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