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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미디어 출연의 명암

얼마 전 전화를 받았습니다. 새로 시작되는 모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이른바 멘토를 맡아달라는 것이죠.

상당히 높은 출연료와 폭넓은 인지도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만 고민 끝에 고사를 했습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양면성은 <씨네21>을 읽는 고상한 독자라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도전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반면에 기회를 뺏는다는 것을요. 단시일 안에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음악인으로 기회를 잡을 수도 있지만 최종결승까지 갈 경우엔 거의 매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면서 결말이 뻔한 아침드라마 같은 존재로 자리잡게 됩니다. 사실 오디션 프로그램의 가장 큰 승자는 심사위원이자 멘토로 불리는 사람들이죠. 미디어에 의해서 권위를 인정받고, 그들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인물을 뽑게 되는 겁니다. 남한과 북한의 최고 정치 지도자는 모두 최고 통치자의 자녀입니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남자주인공은 재벌 3세였습니다. 이처럼 부와 권력이 세습되는 상황에서 음악 같은 예술 장르도 오디션 프로그램의 형태로 세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세습의 구조에 내가 힘을 보탤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주저하게 한 것은 바로 제작진이 저에게 부여할 캐릭터였습니다. 어떤 것을 원하는지 눈에 보였거든요. 제작진이 출연자에게 제의를 할 때 이미 그 사람의 롤에 대한 정의는 끝내놓았을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전 스마트폰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PDA에 관한 책을 국내 최초로 냈습니다. 얼마 뒤 모 홈쇼핑 채널에서 연락이 오더군요. PDA 내비게이션을 판매하는데 출연을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전문가로 나올 줄 알고 거의 이틀 밤을 새워 준비를 했지요. 그런데 스튜디오에서의 저의 역할은 바로 이런 거였습니다. “여기 계신 김남훈씨는 프로레슬러입니다. PDA 내비게이션은 프로레슬러인 김남훈씨가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쉽고 간편합니다.” 그 코너를 진행했던 쇼 호스트분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종종 보험광고에서 그분을 볼 때마다 영화 <25시>의 앤서니 퀸처럼 카메라 앞에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PDA 화면을 스타일러스펜으로 꾹꾹 누르고 있던 당시가 떠올라 채널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디어는 다양한 형태로 캐릭터를 설정합니다. 그것은 외모와 직업이 될 수도 있고, 출신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5, 6공 때 TV드라마의 젊은 남녀주인공은 표준어를, 회사 사장은 부산 사투리를, 그리고 깡패는 전라도 사투리를 썼지요. 가사 도우미는 아예 이름도 없이 충청댁으로 불렸고요. 홈쇼핑에서 PDA 전문가 김남훈이 아니라 무식한 프로레슬러 김남훈이 필요했던 것처럼 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저에게 원하는 캐릭터가 있었을 겁니다. 그 임무를 잘 수행해낼 자신이 없더군요.

저는 프로레슬러입니다만 링에서의 경기보다 라디오와 TV에 출연할 기회가 더 많은 다소 기형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가 만나본 프로듀서와 방송작가는 거의 100% 선량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만드는 프로그램에는 아쉽게도 인격이 없습니다. 오직 시청률이라는 숫자만을 바라볼 뿐이지요. 독자 여러분도 혹시나 방송 출연 제의가 온다면 심사숙고하길 바랍니다. 미디어 출연은 행운과 불운이 1+1 묶음 상품으로 온다는 것을. 많은 것을 주고 많은 것을 다시 가져갈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