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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십니까?
신형철 2013-02-06

<라이프 오브 파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이 글에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3D 안경을 써도 서사가 앞으로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2차원 영상이 3차원이 되면서 입체감을 갖게 되는 것과 서사의 차원이 늘어나서 이야기가 깊어지는 것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서사의 차원 수는 그것대로 따로 따져봐야 될 사항이며 이 글이 관심을 가져볼 만한 것도 그쪽일 것이다. 예컨대 어떤 영화가 ‘한 소년이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다 구조된 이야기’라고 규정될 때 그것은 1차원의 서사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는 그것을 들려주는 사람에 의해 가공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근거해 이 이야기를 ‘한 소년이 자신의 표류 체험을 사후에 재가공한 이야기’로 다시 규정할 경우 이 서사는 2차원이 된다. 뿐인가. 이야기는 그것을 듣는 사람의 해석에 의해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래서 이 서사가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으로 규정되면 이것은 3차원의 서사가 된다. 나는 지금 리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2012)에 세개의 차원(dimension)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수안경을 쓰지 않고 보아도 이것은 3D영화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떤 신비로운 이야기

흔히 이야기의 기본 요소를 인물, 사건, 배경이라고들 한다. 여기서 인물로 번역된 말의 원어는 person이나 figure가 아니라 character다. 성격이 없으면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의 어떤 현자의 말마따나 ‘성격은 곧 운명’이어서, 특정한 성격 안에는 이미 특정한 이야기가 잠재돼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돈키호테와 햄릿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의 제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바로 그들의 이름이다.) 이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현행적인 것(the actual)이 된다. 작가들이 하는 일이란 바로 특정한 성격 안에 잠재돼 있는 이야기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현행화할 수 있는 최상의 상황을 창조하는 일일 것이다. 그 상황 속에서 인물은 그의 성격이 요구하는 선택들을 하며 그것이 서사의 행로를 결정한다. (가끔 소설가들이, 어떤 지점에서부터는 인물이 스스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되었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은 허세가 아니다.) 요컨대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특정한 ‘성격’이 특정한 ‘상황’에 던져졌을 때 어떤 특정한 ‘선택’을 하는지를 지켜보는 작업이다.

이 영화 역시 주인공을 태평양에 내던지기 전에 그의 유년 시절을 설명하는 데 꽤 긴 분량을 할애한다. 상황 이전에 성격이 먼저 구축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피신 몰리토 파텔’이다. 불행하게도 ‘피신’은 ‘pissing’과 발음이 유사해서 그는 집요한 조롱의 대상이 된다. (이름이 ‘김방뇨’인 어느 소년의 고통을 상상해보라.) 그러나 이 소년은 지지 않는다. ‘피신’(Piscine)이라는 이름의 앞 두 글자인 ‘Pi’가 ‘파이’로 읽힐 수 있고 이것이 원주율을 뜻하는 ‘π’의 이름과 같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를 자신의 다른 이름으로 삼는다. 그리고 새 이름에 걸맞은 존재가 되기 위해 원주율을 소수점 이하 수백 자리까지 외워서 ‘전설의 파이’로 등극한다. 왜 하필 파이인가. 알다시피 파이는 무한수인데 모든 무한한 것은 대체로 신성한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소년은 개명을 통해 일약 ‘오줌에서 신성으로’ 도약했다. 이 일화는, 그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적극적으로 조정하려는 비범한 열정의 소유자이고 모든 종류의 신성에 대한 심원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인지시킨다.

이것으로 그의 성격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당연히 부모의 성향이 이 소년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파이가 힌두교(비슈누)와 가톨릭(예수)과 이슬람(알라)의 교리를 어떠한 편견도 없이 차례로 섭렵해나갈 때 여기에 제동을 거는 사람은 그의 아버지다. 그는 프랑스 통치하에 있다가 1954년에 인도 정부에 반환된 폰디체리 지역에서 비교적 성공한 인도인으로 자리를 잡았고,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았을 때 토착신이 아니라 서양 의학에 의해 살아난 이후로 서구적 합리주의의 신봉자가 된 터다. 그래서 종교는 믿을 게 못되며 유일하게 믿어야 할 것은 이성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균형을 잡아주는 것은 파이의 어머니다. 그녀는 이성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마음속의 일’들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고 선을 긋는다. 덕분에 파이는 맹목적인 믿음에 빠지지 않을 만큼은 충분히 이성적이면서도, 이성만능주의라는 또 다른 맹목에 빠지지 않을 만큼 충분히 사려 깊은 청년으로 자란다. 그래서 그에게 산다는 것은 곧 삶의 의미를 찾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는 그 삶의 의미를 사랑에서 찾아보기도 하고, 당대의 젊은 지성들이 탐독했던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뮈의 책에서 찾기도 한다. 바로 이런 인물을 작가/감독은 최악의 상황에 내던지고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주시한다.

이후의 서사를 장면 단위로 다시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표류 서사는 세개의 선을 갖는다. 파이의 대화 상대자가 누구였는가를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고, 신이며,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의 호랑이다. 이 대화 관계가 만드는 세개의 선들 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도드라지는 (그리고 관객 대다수가 집중하는) 서사의 선은 바로 파이와 리처드 사이의 선이다. 파이는 표류일지를 쓰면서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았고, 폭풍을 만나 절규하고 또 환호하는 저 인상적인 장면이 잘 보여주듯 신과의 대화도 지속했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서사의 핵심은 파이와 리처드의 대화다. 둘의 관계는 ‘적대’ 관계에서 ‘적대적 공존’ 관계를 거쳐 마침내는 온전한 ‘공존’ 관계로 진전된다. 이를 파이의 입장에서 두 단계로 줄여 말해보자면, 처음에 파이는 리처드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살아야 했고, 나중에는 리처드가 죽지 않도록 지켜주기 위해 살아야 했다. 어떤 식으로 말하건 그는 리처드 때문에 살아남은 셈이다.

여기까지였다면 이 영화는 모험담의 계보에 포함되었겠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이 영화는 두 시간 가까이 공들여 들려준 이야기를 마지막 십분 동안 뒤집어버린다. ‘여러분이 지금껏 사실 그대로라고 생각하며 들은(본) 것은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아니, 거의 확실히 사실이 아닙니다.’ 배에 타고 있었던 것은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었고 거기서 끔찍한 살육이 벌어졌으며 파이도 거기에 연루되었다는 것. 이 비극을 견뎌내고 생존 투쟁에 나설 힘을 얻어야 했기 때문에 파이는 그가 어렸을 때 서로 영혼을 교류했다고 믿고 있는 저 호랑이 리처드를 자신의 분신으로 창조해서 한배에 태웠다는 것. 영화의 끝에서 우리는 뒤늦게 몇몇 장면들을 복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리처드의 본명은 ‘목마름’(thirsty)이었다. 어린 파이가 성당에서 성수를 훔쳐 먹을 때 신부님은 “너는 목이 마르구나”(You must be thirsty)라고 말하는데 이는 문법적으로 “네가 ‘목마름’이구나”로 번역될 수 있다. 이렇게 둘은 같은 이름으로 불린 적이 있다. 태평양 위에서 파이와 리처드가 밤의 심해를 들여다보는 장면이 둘의 동일성을 노골적으로 암시하기도 했다.

이렇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나면, 멕시코 해안에 도착한 이후 리처드가 홀연히 떠나는 장면에서 파이가 그토록 서럽게 울었던 까닭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파이 자신은 277일 동안 동고동락해온 존재가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버렸기 때문에 울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말한 대로 리처드는 파이가 끔찍한 고통을 견디기 위해 택한 자구책으로서의 망상이니까, 리처드가 떠난다는 것은 방패막이로서의 망상이 사라지고 파이가 다시 실재(the real)의 땅에 내던져진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 땅에서 그는 영웅적으로 혹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조난자가 아니다.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외톨이이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도륙당하는 사태를 막지 못한 무력한 아들이며, 불가피한 응징이긴 했으나 여하튼 한 남자를 난도질한 살인자다. 리처드 덕분에 묻어둘 수 있었던 진실이 귀환할 것이었으므로 파이는 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놀라운 것은 이 반전이 원래 이야기의 가치를 추락시키지 않고 오히려 고양시킨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두개의 논제를 추가로 발생시킨다. 이를 각각 ‘믿음’과 ‘해석’의 문제라고 부르자.

다른 참혹한 이야기

먼저 믿음의 문제. 태평양 위에서 파이의 주된 대화 상대는 리처드였지만 앞서 지적한 대로 그는 신과의 대화도 지속했다. 애초 영화의 도입부에서부터 이미 파이가 들려줄 이야기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을 믿게 만드는 이야기’라고 의미 부여가 됐던 터다. 그래서 이 영화는 ‘신의 존재와 부재’ 혹은 ‘신에 대한 믿음과 불신’을 주제로 한 저 오래된 논쟁에 개입하는 우화로도 읽힌다. 영화 초반부에 소개되는 파이의 성격이 중요한 것도 바로 이 주제와 관련해서다. 말하자면 그는 ‘합리주의적 신앙’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실험하는 데 적합한 대상일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식인섬에서의 체험이다. 삶을 거의 포기했을 때 그는 정체불명의 해초가 자라고 수많은 미어캣이 살고 있는 기이한 섬에 도착한다. 낮에는 생명체를 품고 밤에는 그것을 삼키는 이 이중적인 공간에서 파이는 신의 메시지를 듣는다. 파이 자신의 분석에 따르면 그는 섬에 도착하지 못했을 경우 굶주림과 목마름 때문에 죽었을 것이고, 그 섬에 계속 머물렀다면 나른한 죽음의 유혹에 투항해서 섬에 잡아먹혔을 것이다. 휴식과 경고를 함께 제공한 그 섬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 파이의 결론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섬의 전모가 화면에 잡힐 때 그것은 마치 누워 있는 신의 모습처럼 보인다.

물론 이 에피소드 역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와 같은 파이의 믿음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물음이다. 그 믿음이 그를 살게 했고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어떤 논리적 역전이 발생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제가 도출된다. 믿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면, 살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는 것.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고통이 닥쳤을 때, 이성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어떤 초월적인 것을 믿기로 결정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해야 한다. 이 판단은, 이성을 믿으라는 아버지의 말, 마음속의 일들은 이성이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어머니의 말 중 어느 것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맹목적인 근본주의자들을 화나게 할 만한 소리지만, 어쩌면 이것을 실용주의적 신앙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필요하니까 믿는다는 것. 여기서 신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유구한 논쟁은 별로 의미가 없다. 존재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인 테리 이글턴은, 전투적인 유물론자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인 기대와는 어긋나게도, 2000년대 중반 이후 새삼스럽게 등장한 호전적인 무신론자들(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등)에 동의하지 않는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열정적인 에너지를 바치는 그 무신론자들이 맹목적인 근본주의를 격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통쾌하지만, 그들의 이성에 대한 맹목적 신뢰는 그들이 조롱하는 저 근본주의자들 못지않다는 것이 이글턴의 생각이다. 그러는 와중에 그들은 우리의 삶을 더 깊은 수준에서 사유하는 길을 봉쇄해버린다는 것. “이성은 그 자체보다 더 깊고 끈질기며 덜 허약한 내적 에너지와 자원에 기댈 수 있을 때에만 주도적 힘을 발휘하게 된다. 한데 안타깝게도 자유주의적 합리주의는 이러한 진실을 거의 간과해 버린다.”(<신을 옹호하다>, 2009) ‘신을 믿게 만든다’는 평가를 받은 파이의 이야기도 무신론자인 나의 생각을 끝내 바꾸지는 못했지만, ‘타락한 제도로서의 종교’와 ‘종교적인 것 그 자체’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 중 하나라면 나는 거기에 기꺼이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해석의 문제. 믿음이라는 행위에 대한 파이의 이와 같은 태도는 해석이라는 행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데가 있다. 파이가 들려주는 두 이야기, 즉 신비로운 이야기와 끔찍한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뒤 극중 소설가는 주저하며 말한다. “이 이야기의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군요.” 그러자 파이는 “이미 벌어진 일에서 무슨 의미를 찾습니까?”라고 반문한다. 두 이야기 모두에서 배는 침몰하고 파이는 가족을 잃는다. 의미를 어떻게 따진들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니 의미 따위를 따져서 뭐하겠는가. 파이는 물음의 층위 자체를 바꿔버린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듭니까?”(Which story do you prefer?) 소설가는 호랑이가 등장하는 버전이 “더 나은 이야기”라고 답한다. 소설가는 “better story”라고 답했으나 이 영화의 자막은 이를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옮겼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중대한 오역이다. 파이는 자신이 창조한 이야기가 ‘더 아름답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체험에 대한 그와 같은 허구적 해석이 그로 하여금 남은 생을 살아가는 데 ‘더 낫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

결국 파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과거의 체험을 어떤 식으로든 서사화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저명한 실용주의자 리처드 로티는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1989)에서 자신의 과거를 바로 자신의 언어로 ‘재서술’하는 행위의 중요성에 대해 열렬히 강조한 적이 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읽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비평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이라는 이야기를 전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쓸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운명 혹은 신이 쓴 이야기 속의 힘없는 주인공으로서 태평양 위를 표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과거, 그러니까 누군가에 의해 이미 쓰인 이 이야기를 어찌할 것인가. 우리가 이야기를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어떤 이야기도 그 의미가 확정돼 있지는 않기 때문이고 그 덕분에 우리가 그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몇 문학이론가들은 그와 같은 독서가 작품을 다시 쓰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내가 주인공인 그러나 내가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다시 쓰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그 이야기의 비평가가 되어 그 이야기를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길뿐이다. 실용주의의 개념을 빌리자면 그것이 바로 ‘재서술’일 것이다. 파이가 소설가에게 자신이 경험한 일을 이야기로 만들어 들려줄 때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파이가 들려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는 또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타인의 자기 해석에 대해 우리는 또 어떤 해석을 시도해야 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물음과 같은 물음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극중 소설가와 일본 선박 회사 직원들에게 던져진 물음이기도 하다. 소설가는 리처드 파커가 나오는 이야기가 ‘더 나은 이야기’라고 말했다. 일본 직원들은 끔찍한 진실을 기어코 알아냈지만 정작 보고서를 쓸 때는 파이가 창조한 이야기를 선택했다. 나는 이 영화를 참혹한 기억을 극복하고 어떻게든 살아내기 위해서 ‘사실과는 다른’ 혹은 ‘사실보다 더 나은’ 것을 선택한 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로 받아들였고, 인간의 고통을 신학뿐만이 아니라 해석학적 물음과 연결해서 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깔려 있는 저 불굴의 실용주의가 전적으로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더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소설가나 직원들의 선택에 선뜻 동조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셨는지. 어느 쪽이건, 2013년의 어느 날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본 우리는, 이 영화를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우리가 살아갈 수도 있었을 몇 가지 삶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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