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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멋진 유작’도 보지 못하고
주성철 2013-02-26

뜻하지 않은 사고로 세상을 떠난 고 박철수 감독

“다시 <성철>을 찍을 생각인데, 주성철 기자가 좀 도와줘. (웃음)” 2005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봉자>(2000) 이후 거의 5년 만에 서정, 심지호 주연 <녹색의자>를 개봉하면서(영화 완성은 2003년) 다시 그와 연락이 닿았다. 그에게 성철 스님을 소재로 한 <성철>은 필생의 프로젝트였다. 무려 전체 분량의 85%를 촬영했음에도, 유족 불필 스님과 성철 문도회가 명예훼손과 사실왜곡을 이유로 제작중지 및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 1997년부터 촬영에 들어간 <성철>은 1998년 갑작스레 제작이 중단됐었다. <씨네21>에서 ‘박철수식 영화찍기’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던 그였기에, 당시 그의 신속한 작업속도로 보건대 더딘 송사에 휘말린 <성철>로 인해 상당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의 계획대로 무사히 <성철>을 끝낸 다음 만들고자 했던 작품이 서너편이었다. 하지만 <성철>을 둘러싼 문제들이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으면서 그 계획은 심각한 차질을 빚게 됐고, 결국 <봉자>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뜻하지 않은 긴 공백기가 시작됐다. 물론 추가 제작비 5억원 등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2005년의 재촬영 계획도 결국 물거품이 됐다.

1990년대 후반, 박철수는 흥행과 별개로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감독 중 하나였다. <씨네21> 역사상 단독 1인 표지의 주인공이 된 한국 영화감독이 10명 정도라면, 굵은 뿔테 안경으로 기억된 그는 44호 표지의 주인공이었다. 당시 ‘안경’으로 기억되는 감독은 박광수와 그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푸훗 웃음이 나오는 얘기지만, 정말 그땐 그랬다. 그리고 표지와 함께 그를 다룬 특집기사의 제목은 ‘충무로를 향해 쏴라’였다. 당시 꿈틀대는 충무로의 새로운 기운 안에서 그의 자리는 제법 컸다. <301 302>(1995)가 한국영화로는 최초로 국제적 배급망을 타고 해외에서 개봉했고, 이후 <학생부군신위>(1996)와 <산부인과>(1997)를 거쳐 한국영화 최초로 일본 현역 배우들을 출연시켜 일본 현지에서 촬영한 <가족시네마>(1998)로 이어졌다.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의 자전적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가족시네마>는 당시 재일동포 작가 양석일과 유미리의 동생 유애리가 출연해 큰 화제를 모았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소규모 영화제작 환경 속에 자연스레 녹여내는 그 솜씨는, 1996년 <악어>로 데뷔한 김기덕의 원조쯤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국내외로 승승장구하던 그였으니 <성철> 제작 중단은 너무나 큰 암초였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 극장개봉 장편영화로서는 첫 번째 디지털영화였던 <봉자>로 선회하게 만들었고, 2003년에는 ‘영화를 감독에게 돌려주자’는 슬로건으로 각기 다른 30명의 감독들을 규합해 ‘뉴 시네마 네트워크’(NCN)를 꾸리는 계기가 됐다. 2000년 가을, 대전의 <봉자> 촬영장을 찾았을 때 그는 ‘고 김일우와 현 심이영’, 그러니까 2004년 세상을 떠난 배우 김일우와 이제는 심이영으로 이름을 바꾼 배우 김진아가 출연하는 장면을 촬영 중이었다. 김진아가 김일우를 박스테이프로 냉장고에 칭칭 묶어두는 장면이었다. 어떤 장면이냐고 물었는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은 잘 모르겠고 “스탭과 배우들이 도대체 뭘 찍고 있는지 모를 때 가장 신나”라는 말이 또렷이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이제 디지털이 대세가 될 것”이라며 한참 디지털 예찬론을 펼쳤다. 그로부터 1년 뒤, 과거 월간 영화지 <키노>에서 감독사전을 발간하며 여러 명의 한국 감독들에게 ‘당신의 묘비명을 스스로 쓴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진 적 있다. 그때 그는 이렇게 썼다. “영화를 파괴할 또 다른 영화를 위하여.”

박철수는 “영화는 언제나 관객을 놀라게 만들고, 또한 즐겁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늘 자신의 영화로 관객에게 ‘즐거운 충격’을 주고자 했다. 그러면서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와 백남준을 꼽았다. ‘인간의 고통을 예술적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성철 스님을 그렇게 다루고자 했으니 그런 난관에 부딪힐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세월은 빨리 지나갔다. 이후 야심차게 구상한 NCN이 뜻한 대로 굴러가지 않고, <봉자>와 <녹색의자> 이후 만든 저예산영화들이 큰 주목을 받지 못하면서 그는 어느덧 충무로 바깥의 사람이 됐다.

그럼에도 많은 영화 관계자들이 <부러진 화살>의 정지영처럼, 그를 이어 다시 멋지게 재기할 가능성이 높은 왕년의 감독으로 언제나 그를 꼽았다는 점에서, 지난 2월19일 새벽 그의 뜻하지 않은 죽음은 너무 안타깝다. 심지어 신작 작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졌다는 사실은 너무나 황망하게 다가온다. 문득 그가 자신의 데뷔작에 대해 했던 얘기가 떠오른다. “나는 정말 엉겁결에 아동영화 <골목대장>(1978)으로 데뷔했어. 하나뿐인 데뷔작을 그 따위로 만들어서 늘 나 자신에게 미안했지. 그래서 스스로에게 다짐했어. 나중에 정말 멋진 유작을 만들겠다고. (웃음)” 그렇게 그는 자신의 최고 걸작은 유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갑작스런 죽음에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이 우리 모두의 슬픔이다. 너무 안타깝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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