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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의 컬처 아일랜드]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

A에서 Z까지 26편의 호러 단편 모음 < ABCs of Death >의 교훈

< ABCs of Death >의 포스터

올해 충무로에는 호러영화 제작 소식이 뜸하다. 지난해 개봉작들의 흥행이 신통치 않아서일까? 초여름 개봉을 목표로 시나리오를 끝내고 호러영화를 준비하던 한 제작자는 투자 받기가 쉽지 않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충무로 장르영화들은 지나칠 정도로 편식하는 경향이 있다. 흥행이 좀 된다 싶으면 벌떼처럼 달려들고, 열기가 조금이라도 식는 기미가 보이면 잽싸게 발을 빼버린다. 극장은 투자가 될 만한 영화에 몰빵을 하며 권력을 휘두른다. 영화의 다양성은 사라진 지 오래이고, 대기업의 맞춤식 기획영화들이 극장가를 장악한다. 대중성 높은 영화들도 중요하지만 관객은 취향에 상관없이 분위기에 휩쓸려 영화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예술영화관 운영은 유명무실하다.

지난해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었던 영상 중에 <ABC Monsters>라는 작품이 있다. 빠르게 진행되는 영상 속에서 A에서 Z까지 첫 글자를 딴 영화 제목을 맞히는 것이었다. 제법 난이도가 있지만, 영화의 특징을 워낙 잘 잡아내서 여러 사람이 참여하면 전체를 맞힐 수도 있다. 이들 영화들은 클래식에서 최근작까지 다양하게 녹 아일랜드아 있고, 해외 네티즌은 흥미롭게 즐겼다. 한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ABC 놀이는 영화로 발전했다. 알파벳 26개 문자는 세계 각국의 호러영화 감독들에게 하나의 프로젝트로 돌아갔다. 머리글자를 딴 제목으로 26편의 단편이 한 작품을 위해 완성되어 결합되었다. <ABC Monsters>라는 단편 모음집이다. 123분의 러닝타임에 무려 26편의 호러 단편을 수록한 종합선물세트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단골 게스트로 호러 팬들에게 익숙한 감독들도 참여했고, 반가운 배우들도 만날 수 있다. 호러 앤솔로지는 그동안 여러 차례 제작이 되었으나, 이번 영화는 알파벳을 이용해 제목을 만들고 무려 26편의 개성 넘치는 영화들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 ABCs of Death >의 영화 스틸

< ABCs of Death >의 영화 스틸

<ABC Monsters>는 각각의 영화를 감독에게 맡기면서 그들에게 최대한 예술적 자유를 부여했다. 한편의 영화를 통해 팬들은 26편의 다양한 색깔과 주제를 가진 이야기를 만난다. <ABC Monsters>의 모든 작품이 좋지만은 않다. 어떤 단편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정도로 이상한 것도 있고, 이건 도대체 어떻게 찍었을까, 라며 호기심을 자극하는 단편도 있다. 중요한 건 재능있는 감독들에게 예술적 자유를 주고, 장르영화 본연의 색깔을 유지시켰다는 점이다. 물론 해외라고 해서 장르영화에 늘 우호적이며 상황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장르에 애정과 열정을 쏟는 이들의 관심과 배려가 꾸준하다. 이를 통해 팬덤이 성장하고, 그렇게 형성된 시장을 바탕으로 크고 작은 프로젝트가 이어지는 원동력이 된다.

국내 대중문화에서 늘 안타까운 것이 시장을 만들지도 않고 수익이 이것밖에 안되냐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펴는 거다. 돈을 벌어들이는 쪽에서 먼저 아낌없는 투자를 하고, 그 뒤에 악착같이 거둬들이는 게 순서다.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당장에 ‘ㄱㄴㄷ’까지는 아니어도 다양한 장르영화들을 극장에서 만나보고 싶다. 그 영화들의 완성도가 출중하면 더 바랄 것이 없지만 욕이 나올 정도로 후져도 상관없다. 꾸준하게 이어져갈 수만 있다면 콘텐츠의 질은 높아지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