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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생각했다, 영화라는 틀 ‘밖’에서
이화정 사진 백종헌 2013-03-08

원격조정 디렉팅으로 태어난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의 이재용 감독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이재용 감독에게서 호출이 왔다. ‘영화에 출연하겠냐?’는 난데없는 요청이었다. 내 역할은 세계 최초로 시도된 원격조정 디렉팅 현장을 취재하는 영화잡지 기자였다. 영화에 나온다는 건 두려웠지만, 내가 나를 연기하는 거니 뭐 그리 어려울까 싶었다. 게다가 화려한 출연진과 함께 이재용 감독의 영화에 나올 기회가 아닌가. 보랏빛 기대는 현장 도착과 함께 퇴색됐다. 촬영장은 아비규환이었다. 현장엔 총 17대의 카메라가 있었고, 갤럭시 노트 프로모션용 단편영화 <시네노트>의 촬영팀, 그 현장을 다시 찍는 메이킹 촬영팀이 있었다. 미리 도착한 배우들은 틈만 나면 카페에서 뒷담화에 열을 올리느라 바빴고, 누가 배우인지 스탭인지 구별도 잘 가지 않았다. 이 모든 과잉의 틈바구니에서 오직 감독만 쏙 빠지고 없었다. 할리우드에 있다고 하는데 딱히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카메라 앞에 서서 내 맘대로 대사를 지어냈다.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감독도 다 할리우드 진출하니까 이재용 감독도 이렇게 해서라도 가고 싶은 거야, 할리우드.” 출연한 14명의 배우처럼, 나도 이 말의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연기인지 모르겠다. 솔직히 이렇게 막(!) 찍은 영화가 완성돼서 부산국제영화제, 베를린국제영화제를 거쳐 당당히 극장에서 개봉까지 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그 현장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과연 이렇게 찍어서 영화가 나올까?’라는 생각을 했다. =내 행보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은 또 엉뚱하고 새로운 걸 했다고 생각할 거다. 반면 일년에 영화 1∼2편 보는 사람들은 과연 이런 걸 영화라고 부를 수 있나 의문이 들기도 할 거다. 시나리오가 있고, 얼마만큼 그 시나리오에 근접할 수 있나 노력하며 결과를 예측하고 만드는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작업이었다. 상황을 주고 어떤 일이 일어나나 지켜보는 거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영화가 될 가능성이 있다. 잘되면 잘된 대로 어긋나면 어긋난 대로, 편집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로 전개될 수 있다. 불안하지만 흥분되는 작업이었다.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면, 오히려 더 정교한 시나리오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현장의 혼란을 담는다는 목표를 가진 영화와 실제 그 현장이 혼란스러운 것은 매우 다른 일이다. =그런 문제제기는 여전히 ‘영화’라는 틀에서 생각하다보니 생기는 오류다. 페이크 다큐멘터리나 모큐멘터리를 한다면 더 정교하게 더 드라마틱하게 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건 그렇게 보고자 하는 사람의 갈망일 뿐이다. 난 최소한의 개입으로 배우들의 반응을 담고 싶었다. 이럴 때 배우들은 세 가지 양상을 보인다. 첫째는 감독에게 사전에 들은 이야기를 하는 연기. 그다음은 자기가 그 컨셉을 발전시켜서 카메라 앞에서 가짜 다큐를 하는 연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제로 어느 순간 카메라의 존재를 잊고 자기 본성대로 하는 연기다. 어떤 게 연기고 진짜인지는 연기를 한 배우만이 알 수 있다.

-연장선상의 질문이다. 현장의 배우들 사이에서는 ‘이재용 감독이 실제로는 할리우드에 가지 않았다. 근처의 방에서 보고 있다’라는 의심이 팽배했다. 영화를 봐도 할리우드에 갔다는 확실한 증거를 주지 않는다. 진짜 할리우드를 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나. 지금도 궁금한데, 진짜 가긴 간 건가. =위험했다. 이 영화만 찍는 게 아니라, 갤럭시 노트의 단편 작업을 함께해야 하니 부담이 매우 컸다. 끝까지 고민했다. 하루는 간다, 하루는 감독의 책임감으로 그래선 안된다를 번복했다. 그런데 연출부가 그러더라. 감독님이 이 영화를 하면서 신나했던 이유가 이런 설정 때문인데 가야 하지 않겠냐고. 할리우드에 간 사실을 본 건 연출부 몇명밖에 없었고, 프로듀서한텐 LA에 도착해서 연락했다. 스탭들에게까지 속인 건 현장에서 혼란이 있길 바라서다. 감독이 진짜 갔는지 안 갔는지도 스토리의 축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배우들이 촬영하면서 정말 헷갈려했고 루머가 됐다. 근데 촬영이 하도 힘드니 나중에 배우들은 감독이 갔거나 말거나 영화나 빨리 찍고 끝났으면 하더라. (웃음)

-<여배우들>에 이어서 이번엔 ‘배우들’이라는 제목을 붙여주고 싶었다. 윤여정, 최화정, 오정세, 강혜정, 김민희, 이하늬, 정은채, 김C 등 배우만 14명이다. 그 많은 배우들을 어떻게 섭외한 건가. <여배우들> 때 한번은 속았다 하더라도, 두번까지 속은 배우도 있었다. (웃음) =배우들은 시나리오가 탄탄한 장르영화를 하지만, 한편으로는 늘 자유로운 작업을 부담없이 하는 것에 대한 갈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충분히 대화가 통하는 배우들이 있다. 자기를 드러내야 하고 순간적으로 반응을 보여야 하며, 모험심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짜인 연기를 하는 배우들은 참여하기 힘든 프로젝트다. 이 영화에 참여하는 것은 그런 갈망에 대한 화답이다. 대부분 <여배우들> 정도를 생각하고 왔는데, 이번엔 그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촬영 방식이어서 배우들이 많이 고생했다. 3일 동안 감독 없이 설정만 주니 예상보다 크게 혼란스럽고 힘들었던 거다. 재밌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고, 또 지나고 나서 이번 참여가 무모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배우들의 다종다양한 반응에 감독 스스로를 포함시켰다. 카메라 뒤에 있어야 할 감독이 직접 ‘감독 역’을 하며 자신을 희화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번 영화가 여섯 번째 작품인데, 심정적으로는 5와 1/2번째 작품 같다. 나의 그동안의 커리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화가의 아틀리에를 공개한 기분이다. 그간 평가가 좋았던 적도 있었고 반대의 경우도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나라고 생각한다. 정신건강을 위해, 계속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인터넷 댓글은 안 보고 지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보다는 자기 희화가 더 재밌다고 본다. 누구나 부족한 점이 있고, 그래서 스스로 희화화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사실 내가 엄숙한 걸 워낙 안 좋아하기도 하고.

-할리우드 사무실에 편하게 앉아서 원격조정한 이 영화의 촬영 과정은 실질적으로 어떻게 진행됐나. 기술적인 난점도 적지 않았을 텐데. =두 가지 영화가 동시에 진행됐다. 하나는 갤럭시 노트 프로모션용 단편영화. 또 하나는 메이킹 다큐멘터리다. 한편 찍는 것도 힘든데 3일 만에 이걸 다 찍자니 무모한 시도였던 건 확실하다. 애초 그 혼란스러움과 답답함을 전제한 거니 어떻게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것인지가 결국 이번 작업의 숙제이자 일종의 게임이었다. 물론 기술적인 문제는 있었다. 인터넷이 끊기면, 전화 통화를 하고 그것도 안되면 문자를 했다. 현장과 연결하기 위한 모든 기술적 수단을 동원했다. 그런데 사실 원래 현장도 카오스이긴 마찬가지다. 배우 매니저가 와서 배우 기분이 안 좋다고 따지기도 하고, 미술부에서 갑자기 준비가 안됐다고 하는 일도 속출한다. 여긴 카메라만 끄면 그런 불만을 다 안 들어도 되니 오히려 좋았다. (웃음) 답답함만큼, 소통이 안된 만큼 한편으로는 덜 예민한 현장이기도 했다.

-<정사>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이하 <스캔들>)가 프리 프로덕션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 영화였다면, 이번엔 사전작업보다 후반작업에 더 많은 공력을 쏟아야 했다. 얼마나 찍었고, 얼마나 작업했나. =촬영 분량만 200시간이 넘었다. 한번 보고 정리하는 데만 3개월 넘는 과정이 걸렸다. 시도의 의미가 컸지만 결국 이 영화는 관객과 만나야 했고, 그래서 나름의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야 했다. 기준이 있다면 느슨하지 않게 긴장감을 주면서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계속 세공을 해보는 거다. 자막도 넣어보고 음악도 넣어보고 시간을 재구성해서 이틀로 압축하기도 하고 다른 날 찍은 걸 정교하게 앞뒤로 배치도 해본다. 지난 5개월 동안 편집기 앞에서 시나리오를 쓴 거다. <스캔들> 찍을 때를 되돌아보면 그땐 카메라 앞에서 한시도 떠나질 않았다. 남들이 ‘저 감독은 화장실도 안 가고 밥도 안 먹나’ 할 정도로 붙어 있었다. 머릿속의 모든 것이 콘티가 되고 영화로 나올 수 있게 남들 쉴 때도 콘티를 짰으니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현장에 가지 않고도 원격조정이 가능하다는 기술적 의미에서 감독의 부재를 설정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감독의 부재가 주는 상징성으로도 읽힌다. 제작자가 감독을 통제하는 할리우드 시스템(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에서 감독의 역할이 유명무실하다는 건가, 아니면 이 영화의 혼란을 통해, 이 시대 감독으로서의 중요성을 더 확고히 하려는 시도인가. =오히려 감독의 존재를 더 부각하고 싶었다. 현장에서 감독은 보통 한개의 모니터를 본다. 그런데 이 시스템은 분장실, 대기실, 현장 등에 여러 대의 카메라를 배치하고 감독은 한곳에서 그곳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구조다. 아직은 낯설고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자. 옛날엔 직접 만나지 않고 어떻게 전화로, 화상으로 소통하냐고 했었다. 지금은 화상으로 수술도 하는 시대다. 할리우드에서는 감독이 가지 않고 B카메라, C카메라가 장면을 찍어오기도 한다. 현대예술의 범주에서 보자면, 포스트모던 이전 시대의 예술, 장인정신으로 하나하나 숨결을 불어넣어 구현하던 시대는 지났다. 미술계는 이미 그걸 증명하고 있다. 차용하고 패러디하고, 공장에서 찍어내고 예술가는 그걸 전체적으로 디렉팅하기만 한다. 영화는 아직까지 그러지 못했던 영역이다. 그런데 최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감독이 없는 영화를 찍었다는 이야기가 들리더라.

-<다세포소녀>의 시도 이후 <여배우들> 그리고 이번 작품까지가 하나의 흐름으로 묶인다.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영화 방식과 동떨어진 영화를 만든다는 점에서 공격의 지점이 되기도 한다. =웰메이드한 영화를 만들어왔고 해낸 감독이니 산업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왜 저 재능을 아깝게 마구 쓰나 하는 걱정도 할 것이다. 그런데 내게는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때의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 동력인 것 같다. <스캔들>처럼 장인정신을 가지고 목표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한 작품도 있고, <순애보>처럼 내 취향과 경험을 담아낸 영화도 있다. 또 영화를 공부할 때부터 고민해온, 영화의 장르를 벗어나 이런 것도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새로운 형식을 시도한 작품도 있다. 난 이 세 부류가 모두 내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번 시사 끝나고 동료 감독들이 부럽다고 하더라. 여전히 철이 없다는 이야기겠지만, 지치지 않고 의문을 가지고 새로운 아이디어에 열정을 쏟을 수 있는 게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다.

-다음 작품은 앞서 말한 세 부류 중 어떤 부류에 속하는 건가. =20년 가까이 영화를 하면서 이제 여섯편째다. 그러다보니 하고 싶은 것들이 숙제처럼 밀려 있다. 때만 기다리고 있는 영화들이 있는 거다. 여전히 세 부류의 영화를 다 하고 싶은데, 일단 가장 몰두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모든 사람들이 지금의 시대에 화두로 삼을 수 있을 만한 주제, 보편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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