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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WHAT] 최해갑과 소로

매달 건강보험료 영수증을 받아볼 때마다 화가 치민다. 일년에 병원이라고 해봐야 겨우 두세번 갈까말까다. 그런데 매달 18만원에 가까운 건강보험료를 꼬박꼬박 내야 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된 지 1년이 넘었는데도 보험료는 요지부동이다. 회사에서 내주는 게 없으니 그전보다 2배나 많이 내고 있는 셈이다. 예전에 비해 수입이 줄어들었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보험료를 내야 하는 거냐고 담당 국가기관에 물어보니 집이 있어서 그렇단다. 대출 받아서 집 사게 만들어놓고, 그 월부금을 다 갚기 전까지는 사실상 내 집도 아닌 채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데, 집이 있다는 이유로 그렇게 많은 건강보험료까지 챙겨가는 국가가 밉다. 미워도 너무 미워서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사람’으로 살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도 해봤다.

그래서 이 영화 <남쪽으로 튀어>가 진심으로 잘되길 바랐다. 영화가 잘되면 국민연금, 건강보험, 전기세에 포함되어 나오는 공영방송 TV 수신료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무지막지하게 많아져서 국가를 혼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애초에 너무 기대가 컸던 탓일까? 처음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진부하고 시들한 코미디영화가 되면서 이상하게 불편하고 안쓰러웠다. 무엇보다 국가의 간섭과 착취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룸펜 아버지 최해갑의 모험담이 멋있고 기발한 아나키스트의 저항운동이 아니라 그냥 웃자고 만든 허무맹랑한 만화처럼 보여서 안타까웠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싶은 마음에 오쿠다 히데오의 원작 <남쪽으로 튀어!>를 봤다. 오, 이 아저씨 죽인다. “체제에 빌붙어 사는 개따위와 말을 섞을 마음은 없어. 나는 관청이 벌레보다 싫어. 국민 세금의 떡고물로 연명하겠다는 그 근성이 영 맘에 안 들어.” 지로의 아버지가 국민연금과에서 나온 공무원에게 하는 소리다. 이제야 뭐가 문제인지 알겠다. 예컨대 <남쪽으로 튀어>는 21세기 버전의 드라마로 옮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의 불복종>인데, 그걸 누구나 무리없이 웃을 수 있고 정부도 별로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을 만한 가벼운 코미디로 만들겠다는 발상 자체가 일종의 관객 모독처럼 느껴지는 영화였다.

소로는 하버드를 졸업할 때 양가죽으로 만든 졸업장을 위한 수수료 1달러 내기를 거부했던 사람이다. “양가죽은 양들이 갖고 있도록 내버려두라” 하면서. 그뿐만 아니라 학생을 ‘매질’해야 한다는 이유로 2주 만에 교직에서 물러났고 미국 정부가 우리나라로 치면 주민세에 해당하는 인두세를 새롭게 제정하자 “그 돈이 노예 사는 데 쓰이는지,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총을 만드는 데 쓰이는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하며 세금 납부를 단호히 거부하다가 감옥에 가기도 했다. 그리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부나 문명 세계에 충성하는 삶을 거부하고 자족적인 삶을 누리고자 손수레에 단출하게 짐을 꾸려 월든 숲으로 갔다. 예컨대 최해갑도 그런 사람이다. 심지어 한발 더 나아가 그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아이들까지 데리고 섬으로 간다. 이 세상에 태어난 죄로 누구나 굴리게 되어 있는 시시포스의 바위 같은 임무를 나는 물론 내 아이들에게도 물려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에겐 있었다. 그럼 점에서 최해갑은 소로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비전을 보여준다. 비록 TV 단막극 스타일의 시시한 코미디영화로 만들어졌지만 나는 최해갑에게서 그런 혁명적인 비전을 봤다. 그래서 아쉽다. 영화 <남쪽으로 튀어>의 그 시시하고 지지부진한 행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