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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출발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 펴낸 지식소매상 유시민

Profile

1985년 학생운동 시절 구속되면서 <항소이유서>를 통해 필력을 알리기 시작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등의 베스트셀러를 내며 시사평론가, 토론진행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다 2003년 정계에 입문, 최근 10년간의 정치활동을 끝내며 지식소매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환한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팬이라며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도 있고 꼭 만나고 싶었다며 편지를 남기고 간 사람도 있다. 대부분 책 잘 보겠다는 말로 인사를 마무리한다. 자연인 유시민이 있는 풍경은 정치인 유시민이 머물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필요한 정치인을 잃었다는 아쉬움도 잠시, 환하게 밝아져 있는 그의 표정을 마주하니 어느새 그의 선택을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인다. 하긴 대신 좋은 글쟁이 한명을 얻었으니 그리 나쁘지 않은 거래다. 10년 만에 지식소매상으로 돌아온 유시민 전 의원을 만났다.

-정치하다 그만두면 온화해진다던데 표정이 편안해 보인다. =당연하지. 직업정치는 긴장의 연속이니까. 50.1%를 얻는 사람이 모든 걸 가져가는 우리나라의 선거제도하에서는 수치가 모든 행동의 기준이 된다. 나의 말, 행동 하나가 그 숫자를 위해 얼마나 도움이 되고 얼마나 해가 될지 늘 판단해야 하니 얼마나 피곤하겠나. 지금은 내가 하는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도치 않은 피해나 아픔을 줄 일은 거의 없어 마음이 편하다.

-그렇게 홀가분한가. =공익근무를 제대한 거 같다고 할까. 제대해서 민간인이 되면 모자 좀 삐딱하게 써도 괜찮지 않나.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벗어난 것 자체가 공적인 책임에서 풀려났다는 의미니까 눈치 볼 것 없이 딱 내가 사는 만큼만 살면 된다. 책이 많이 팔리면 많이 팔려서 좋고 적게 팔리면 적게 팔리는 대로 좋고. 그러다보니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여러 가지로 좋다.

-정계 은퇴를 아쉬워하는 이들도 많은데. =직업 정치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나온 거다. 그런 부분에 대한 비난은 기꺼이 감수하겠고 짊어져야 할 몫이다. 하지만 이제는 정치인 유시민이 아니라 지식소매상 유시민으로 봐주시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바뀔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아직 어색한가보더라. 3년 뒤에 상황 바뀌면 다시 기어나올 거라는 둥 온갖 이야기를 다 들었다. 이제껏 내게 관심없었던 언론들까지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지만 다 거절했다. 종편이든 공중파든 일반 언론사든 인터뷰를 할라치면 안철수의 노원병 출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는 둥 정치적인 질문이 먼저 나온다. 이젠 정치인이 아닌데 계속 그런 인터뷰를 할 수 없지 않나. <씨네21>은 영화 주간지니까 고약하게 해석될 여지가 적을 것 같아 마음이 편하다. 이젠 나도 출판문화쪽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모양새도 자연스럽고.

위로 아니고 삶을 직시하자다

-한편으론 글쟁이 유시민의 귀환이 반갑다. 이번에 쓴 <어떻게 살 것인가>는 벌써 베스트셀러가 됐더라. =감사하다. 출판사의 잘 아는 사람에게 책을 써주기로 하고 돈을 미리 받았다가 여기까지 왔다. (웃음) 당 총선 치를 때 돈은 없고 책을 쓰던 시기도 아니라 딱히 수입도 없고 해서 “책 하나 써줄 테니 돈 좀 줘라. 대신 국회의원 당선 되면 몇년이 걸릴진 모르겠다”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자고 하더라. 근데 내 비례대표 번호가 12번이었지 않나. (웃음) 떨어지고 나니 바로 책 쓰라고 연락이 왔는데 제목이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난감해서 이거 말고 편하게 쓸 수 있는 다른 걸로하자고 했지만 꼭 저걸로 해야 한다고 해서 하게 됐다. 그런데 초고를 다 쓰고 봤더니 책을 내지 말든가, 책을 낼 거면 정치를 그만둬야 하는 책이 됐다.

-제목만 보고 정계 은퇴를 결정한 뒤 쓴 책인 줄 알았다. =반대다. 쓰면서 결심하게 된 거지. 책에서는 ‘마음이 설레고 열정이 샘솟고 하고 싶은 그런 일을 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이 옳다’고 이야기를 해놓고는 나는 별로 안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정치 좋아하고 권력을 위해서라면 못하는 짓이 없고 온갖 술수와 잔머리를 굴리며 정치판을 누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런 상황에서 저 책을 내면 나는 정말 정치를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되는 거다. 근데 아니거든. 독자들에게 거짓말하는 책을 낼 수는 없으니 책을 내지 말든가, 딴 책을 쓰든가, 아니면 아예 정치를 그만두든가. 그 고민을 지난 해 가을부터 시작했고 선거 끝나고 한달 반 동안 정리하면서 생각이 확실해졌다. 결과는 보시는대로.

-제목은 ‘어떻게 살 것인가’지만 읽다보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처럼 보인다. =사실 내 안에서의 출발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였다. 위로보다는 심각하게 한번 생각해보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 밝은 거, 좋은 것만 생각하면 인생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삶에는 어쩔 수 없이 회피 불가능한 고독이 있고 그 시간이 꼭 나쁜 건 아니다. 고독할 시간이 없으면 자기 인생을 직시하기가 어렵다. 물론 늘 고독하면 안되겠지만. 삶은 환희만큼의 어둠도 존재한다. 사람들이 그걸 잊어버리고 어두운 측면을 밀어내려고만 하기 때문에 삶의 좋은 측면도 충분히 느낄 수 없는 거다. 결핍이 없으면 만족도 없다. 진짜 자신을 들여다보고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게 뭔지 보기 위해서는 내가 싫고 피하고 싶은 걸 직시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내게 10년의 정치 생활이 없었다면 요즘처럼 아무 약속도, 의무도 없는 날이 왔을 때 이 안온함과 즐거움을 못 느꼈을 것 같다. 삶이 본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양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그게 위로라면 위로일 순 있겠지만.

-읽다보면 미리 쓴 유언장 같은 느낌이 들어 짠하기도 하고 왠지 편하기도 하다. 평소에도 자주 끝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나. =그런 편일지도 모르겠다. 20살 무렵에 투쟁할 때도 내심 이런다고 유신체제가 무너지겠냐는 회의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잘못된 걸 뻔히 알면서 그냥 덮고 넘어가면 나중에 죽을 때 창피할 것 같았다. 지금 이 일을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땐, 망설이지 않고 했다. 30대가 되면서 한동안 잊고 살았지만 지금도 이걸 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의심이 생길 때는 죽기 직전의 나를 상상한다. 모호할 때도 있지만 명백하게 ‘지금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내 자신이 비참할 것 같아’란 느낌이 들면, 그렇게 한다. 지금 직업 정치를 그만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생을 다 살고 지구를 떠날 때의 시점에서 지금을 돌아보는 건 평생을 따라다닌 습관 같다.

-책에서 충만한 삶을 위해 사랑, 일, 놀이와 함께 연대를 강조한 점이 인상 깊었다. =우리는 대부분 뿌리 깊은 목적론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어떤 존재가 있을 때 그것에 고유한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 다시 말해 이데아를 실현해야 선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인간의 이데아는 뭐지? 인간이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건가? 다른 사물에 대해서는 그럴듯한데 인간이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수용이 안된다.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면 사물은 다 자기의 본성을 실현할 때 가치가 있고 나는 사랑, 일, 놀이와 더불어 공감을 바탕으로 교류하고 협력하고 배려하는 일체의 행위, 그러니까 ‘연대’도 인간의 본원적 욕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기쁨을 누릴 때 함께 누리고자 하는 마음. 누군가가 슬플 때 함께 슬퍼하려는 마음. 주로 유전적으로 나와 무관한 타인에 대한 공감의 표현. 개인적인 자선과 기부부터 시작해서 혁명운동까지 방식은 다양하다. 제일 좋은 삶은 그 본성을 있는 그대로 실현하고 표현하는 거다. 그렇게 살아야 생의 마지막 날 ‘나 잘 살았어’라며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지 않을까.

이상과 현실 사이, 고독한 권력자 <링컨>

-요즘 영화도 많이 본다고 들었다. =정치할 때도 회자되는 영화들은 짬짬이 챙겨봤다. 요즘은 개봉한 영화들은 거의 다 본 것 같은데. <7번방의 선물>은 스토리에 이상한 점이 있긴 해도 재미있게 봤다. 원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영화는 아니니까. 게다가 1만원으로 그런 감정을 어디 가서 느끼겠나. <남쪽으로 튀어>는 잘 만든 영화인데, 너무 고급스럽게 만들어서 그 맛을 충분히 느끼기가 어렵더라. 오래 씹어야 맛이 나는 고기 같은? <베를린>은 남북관계를 배경으로 첩보원들의 인간적인 드라마를 그린다곤 하는데 내가 느끼기엔 반공영화 같더라. 만화적인 차원에서 남북관계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기도 했고. <파파로티>는… 음악이 좀더 나왔으면 좋았을걸. (웃음)

-거의 영화평론가 수준이다. =별로 창의성 없는 얘기를 한 거지. (웃음)

-<링컨>은 어떻게 봤나. 아무래도 남달랐을 것 같은데. =여러 가지 느낌과 생각이 들었다. 링컨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독한 권력자로 그렸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고매한 이상과 비루한 현실 사이의 충돌? 엮임? 그런 대목들이 많이 도드라지더라. 엔터테이너로서의 스필버그보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스필버그가 느껴졌다. 결함없는 이상과 현실의 여러 장애를 가지고 고민해본 사람은 확 와닿을텐데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살진 않으니 관객에게 얼마나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을까 괜한 걱정이 들기도 했고.

-특별히 공감 갔던 장면이 있나. =급진파 스티븐스 의원과 나누는 나침반 이야기. 나침반은 방향만 알려주지 가는 길의 정보를 제공하진 않는다는 말. 그리고 스티븐슨이 수정헌법 개헌을 위해 평생을 믿어온 ‘만인 앞의 평등’을 ‘법 앞의 평등’이란 좁은 범위로 의미를 국한하는 장면. 링컨이란 인물을 떼어놓고 보면 그게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핵심적인 주제 같다. 링컨이 영부인에게 하는 말도 인상적이었다. “아버지로서의 짐은 내가 감당해야 하고 어머니로서의 짐은 당신이 감당해야 할 각자의 몫”이라는. 궁극적으로 삶은 고독한 거고 그건 부부나 부모자식간에도 대신 짊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링컨은 성공한 정치인이자 위인인데 그런 사람도 고독을 가지고 있더라. =‘그런 사람도’가 아니고 ‘그런 사람 이기에’ 더욱 혹독하게 겪는 거다. 영화 내내 링컨의 괴로움이 나타나지 않나. 자기 의사 결정에 따라서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게 권력자의 자리다. 종전과 노예해방 사이에서 우선 순위를 정해 정치적인 판단을 하는 사이 전쟁 기간은 연장된다. 링컨 입장에서는 피할 수도 있었던 수많은 죽음들이 자신의 의사 결정 때문에 희생된 거니 오죽 괴로웠을까. 그런데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하던 참모들이 계획에 동의를 하지 않자 링컨이 구체적인 설명은 안 해주고 ‘표 구해와!’라고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있다. 때로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의 구상을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왜냐하면 설명하는 순간 그 일이 어그러지기 때문에. 권력자의 의도를 명확히 아는 즉시 그것이 사람들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끼쳐 원래의 구상이 좌절되는 상황은 정치에서는 일상이다.

-참여정부 때도 그런 적이 있었나. =물론이다. 대통령이 어떤 의사 결정을 하면서 그 실제적인 이유를 있는 그대로 다 말하지 못하는 상황은 비일비재하다. 아마 지정기록물에 남아 있을 테지만 예를 들면 이라크 파병이나 대북 송금 특검에 관한 것들. 당시 남북관계에 관해서는 보수진영과 대립하고 있었고, 이라크 파병 문제에 관해서는 진보쪽과 대립 중이었으며, 한-미관계와 북-미관계는 꼬여 있는데 남북한 사이에는 김대중 정부 때부터 만들어졌던 신뢰의 기반이 어느 정도 있는 상태였다. 이런 복잡한 밑그림 하에 ‘내게 맡겨진 역할은 이런 것이다’라는 판단으로 제각각 움직이는 거다. 그걸 다 알려고 그러면 아무것도 못한다. 대통령이 어떤 판단을 내린 배경에 대해 ‘나는 다 이해를 해야 움직이겠다’고 하면 누가 대통령을 할 수 있겠나? 누군가는 전체의 스토리를 알지 못해도 내게 맡겨진 역할을 짐작하고 움직여줘야만 일이 될 때가 있다. 링컨의 본심을 민주당, 공화당 급진파, 공화당 우파 대통령의 참모들 모두가 다 알고 있었더라면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 링컨의 국무장관을 보면 가끔씩 이해가 안돼서 대들어도 결국 대통령이 하자는 대로 믿고 따라가잖나. 좋은 국무장관인 것 같다, 그 사람. (웃음)

고독한 자유, 고독할 자유

-윌리엄 H. 슈어드 국무장관처럼 대든 적 있나. =대연정발표 했을 때 진작 귀띔 좀 해주시지라고 말씀드린 적은 있다. (웃음) 모르면 어떤가. 다른 의도로 그런 일을 하실 분도 아니고 일단은 좋은 뜻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일하는 거지. 꼭 내가 알 필요가 있는 게 아니니까 이야기하지 않으셨을 테고.

-영화에서 특히 고독이라는 감정을 특별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링컨과 영부인, 흑인 하녀가 노예제도 폐지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질까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흑인 하녀가 자유를 얻었을 때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우다 죽었고 그거면 충분하지 않느냐는 말을 한다. 굉장히 와닿았다. 사람은 미래를 전부 설계할 수 없다. 우리의 직관과 본능이 명하는 것이 있으면 그걸 하는 거다. 자유에 대한 갈구가 그런 종류의 일이다. 어쨌든 나는 지금 그같은 자유를 얻은 상태다. 앞으로 한달 뒤, 일년 뒤의 내 삶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상태가 참 좋다. 당분간은 이 고독한 자유, 고독할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

-정치가 피곤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면 글쓰기는 어떤 의미인가. =때로는 놀이. 주로 밥벌이? (웃음) 일단 쓴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다. 시간이 지나 글쟁이로 완전히 전환되고 나면 좀더 이런저런 종류의 글들을 써볼까 한다. 살면서 느낀 소소한 감정이나 소감 같은. 다만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자유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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