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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이런 무력함이라니

<제로 다크 서티>의 고문장면 논쟁에서 당신이 놓쳤을 것들

9.11 테러 이후 빈 라덴을 사살하기까지 CIA의 비밀활동을 다루며 여전히 첨예한 정치적 쟁점을 건드린 탓에 <제로 다크 서티>는 비교적 고른 지지를 얻은 <허트 로커>에 비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들에 따라오기 마련인 불평들, 이를테면 실제로 일어난 일을 왜곡했다며 온갖 증거들을 나열하는, 대개의 경우 영화 자체와 별 관계가 없는 비평들은 열외로 두자. <제로 다크 서티>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들이 문제를 삼는 지점은 영화에 등장하는 고문장면에 대한 영화의 태도이다. 빈 라덴에 대한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보여주고 있으므로 결국은 고문을 옹호하는 것이라는 비판적 견해가 한편에, 오히려 현실의 고문을 폭로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다른 한편에 있다(“악은 어디에 있는가?”, <씨네 21> 894호). 캐스린 비글로는 이런 논쟁에 대해 <제로 다크 서티>는 판단을 내리는 영화가 아니라 현장감을 중시하는 영화라는 식으로 에둘러 방어하고 있지만, 고문이 어떻게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사안일 수 있냐는 비판을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혹은 영화적 입장 앞에서의 지나친 신중함이 오히려 영화를 오해하기 쉽게 만들었거나 고문의 도덕성과 유효성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논의들을 가리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JonathanRosenbaum.com’, 2013년 2월 13일).

현장감이라고?

그런데 정작 내게 흥미로웠던 건 정치적으로 뜨거운 감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입장을 선택한 다음, 영화 안과 밖을 혼란스럽게 오가며 결국 논리를 단순화하는 미국 평단의 반응이 아니라, 이 영화가 한국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이다. 이 영화를 보고 쓴 비평가들의 평이나 일반 관객의 단상은 대체로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이라는 단서를 달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장르로서 영화가 주는 쾌감, 특히 그 현장감에는 매혹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공유한다. 말하자면 캐스린 비글로가 성취한 영화적 야심을 즐기면서 그 영화에 내재된 이데올로기는 불편해한다는 것이다. 그 태도를 문제 삼고 싶은 건 아니다. 어쩌면 이 간극은 모든 전쟁‘영화’들을 보면서 관객인 우리가 언제나 느낄 수밖에 없는 모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고문을 옹호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으로 <제로 다크 서티>를 판단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라면, 나는 망설인다. 이 영화에는 그보다 복잡한 쟁점들이 있거나, 질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고문을 방관하거나 자행했던 요원들이 텔레비전 화면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대담을 보는 장면이 있다. 그는 미국은 그 어떤 고문도 도덕적으로 용인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영화상 이미 수많은 고문장면들이 지나간 뒤이며, 요원들은 그 단호한 주장을 무감한 응시로 쳐다보고 일순간 정적이 감돈다. 매우 짧게 스쳐가지만, 이 순간의 모호함이 이 영화가 머뭇거리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를 비판하는 이들이 지적하듯, 그 모호함이 결국 영화의 위험한 태도라고 하더라도 나는 위와 같은 이분화된 입장 중 하나를 택하는 것보다 이 위태로운 지점에 머무르며 영화를 보려고 한다.

이 영화가 결국 고문을 정당화하고 말았다고 비판하는 견해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지점은 고문장면 자체가 재현되는 방식의 윤리는 아닌 것 같다. 비판의 초점은 빈 라덴 사살작전을 위해서 고문이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인 것처럼 그려지고 있으며, 고문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는 상황에 맞춰진다. 말하자면 이들은 고문이 등장하는 시점이 아니라, 빈 라덴 사살작전이 완료되는 장면들이 지난 뒤, 즉 이 영화의 현장감이 클라이맥스에 달한 장면들을 즐긴 다음, 영화가 이 지점에 이르는 데 고문이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문제 삼는다. 여기에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는데, 그건 빈 라덴 사살장면의 영화 내외적인 함의를 일단 정당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좀 거칠게 말해, 이들의 질문은 선한 목적(악의 축을 제거)을 위해 악한 방법(고문)을 동원해도 되는가, 에 있지 그것은 과연 선한 목적인가, 그 목적이 은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에 있지 않다. 9.11 테러 이후 나돌던 음모론을 새삼 꺼내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나는 영화 속 고문의 쓰임새에 대한 문제제기 이전에 먼저 말해져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 전투장면에서 영화가 취하는 입장의 층위 혹은 정치성을 따지지 않고서, 이 영화의 고문에 대한 태도를 단정짓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 전투장면의 목적이 많은 사람들의 지적처럼 생생한 현장감에 있다면, 전쟁영화에서 현장감이란 관객인 우리로 하여금 무엇에 반응하도록 하는 것인지, 그때 우리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물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후반부의 전투장면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그와 일종의 짝을 이루는 영화의 도입부를 경유해야 한다. 암전된 화면 위로 9.11 테러 현장에서 실제로 녹음된 다급한 목소리와 아수라장이 된 상황의 노이즈가 파편적으로 흩어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서사를 불러일으킨 현실의 결정적 사태가 초반의 검은 화면에 압축되어 있다. 십여년이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이미지로 생생하게 각인된,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시청한 현실의 그 순간을 영화는 스펙터클화하지 않는다. 재난영화의 한 장면처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이어서 우리를 섬뜩하게 끌어당겼던 현실의 그 이미지가 정작 영화 안에는 지워져 있고 대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보증하는 현실의 목소리만이 거기 있다. 이와 달리 빈 라덴의 사살작전이 펼쳐지는 후반의 전투장면에서 우리는 특수 제작된 야간 투시경이 잡아낸 이미지와 개별 군인들의 숨소리에 포위된다. 현실에서 빈 라덴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지 못한 우리는 영화가 현장감의 구축을 위해 과잉되게 배치한 이미지와 사운드(실은 현실에서 우리의 자연적인 눈으로는 접근하지 못하고 기계의 눈으로 접근되는 ‘과도한’ 현실)에 밀착되어 마치 그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말하자면 도입부와 이 후반의 전투장면은 어떤 식으로든 대응하는 것 같다. 영화가 현실에서 우리가 본 것을 이미지의 공백으로 만들고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이미지의 과잉으로 살려내며 그 둘을 한줄로 엮어 마주보게 할 때, 우리에게는 몇개의 질문이 가능하다. 둘의 관계는 시각적 체험의 무기력한 자리로부터 최전선에서의 신체적 체험으로의 전환인가? 관객인 우리가 매혹되고 감독이 의도한 현장감이란 그 전환의 쾌감인가? 가상처럼 현실을 찢고 들어온 테러의 충격에 대한 영화적 대답이 후반부의 전투장면, 즉 현장감에 몰두하는 가상일까? 9.11 테러가 우리에게 안긴 무력감과 두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부할 수 없었던 시각적 쾌감, 즉 현실의 언어로 설명 불가능한 사태의 구멍, 영화에서 암전된 화면으로만 접근된 그 심연을 빈 라덴 사살작전에 돌입한 후반의 시퀀스, 실은 우리로서는 허구로만 접근 가능한 과정들이 (정치적으로든 장르적으로든) 메워주고 있는가? 이 질문에 간단히 대답하고 말기에 빈 라덴의 은신처에 잠입하는 후반의 전투장면에는 좀더 들여다봐야 할 것들이 있다.

녹색 화면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이유

전쟁영화가 현장감을 강조할 때, 그 효과는 대개의 경우 시점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영화가 우리를 양 진영 중 어느 쪽의 시점에 더 동일시하게 만드는지, 혹은 어느 개별 인간의 시선으로 상황을 겪게 하는지에 따라 우리가 느끼는 현장감의 쾌감은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떠한가? “요원들이 야간 습격 당시 투시경을 끼고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야간 투시 렌즈를 카메라에 장착해 화면 전체를 녹색 빛으로 채운”(“악은 어디에 있는가?”, <씨네21> 894호) 이 장면을 통해 캐스린 비글로는 관객에게 “당신이 거기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캐스린 비글로가 말하지 않은 건 당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당신이 점유하는 시선은 미군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 안에서 그 시선은 일방적이다. 실제 현실에서는 어떤 식으로 빈 라덴이 제압되었는지 모르지만, 영화에서 우리는 빈 라덴쪽 사람들의 시선을 감지하지 못하고 저항의 움직임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다.

<허트 로커>에서 폭발물 처리반뿐만 아니라 관객을 불안하게 하는 건 미군을 쳐다보던 저항군의 시점숏, 혹은 파편적으로 흩어진 그들의 끈질긴 응시다. 아니, 영화는 그 시선의 주인이 저항군인지 민간인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존재하게 두었고, 심지어는 폭발물이 터진 다음에도 이것이 그들의 소행인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미군을 숨어서, 혹은 드러내놓고 응시하고 있는데, 영화가 그 시선을 테러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아서 그 간극에서 종종 불길함과 두려움이 양산된다. 누군가에게 바라보인다는 사실, 타인의 시선에 노출된다는 사실 자체가 공격받을 가능성을 전제한다는 이 간단한 논리로 영화는 총과 폭탄에 의한 신체 절단이 주는 공포보다 더 지독하게 인간의 심리를 괴롭히는 불안을 보여준다. 그러나 <제로 다크 서티>에서 요원들이 상대 진영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 장면은 거의 없다. 물론 마야가 집 앞에서 공격을 받는 장면이 있고, 요원들의 신원이 노출된 위험에 대해 말하는 장면들이 있지만, <허트 로커>에 비한다면 상대 조직의 시점은 거의 제거되어 있거나 무력하다. 특히 빈 라덴의 은신처를 습격하는 장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제로 다크 서티>는 폭발물 처리반의 이야기가 아니니 영화가 시선을 운용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시선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마지막 전투장면에서 우리가 느낀 현장감이란 관객의 시선과 미군의 시선, 그리고 카메라의 시선이 동일시된 결과로 받아들여도 될 것인가? 이 전투장면의 대부분이 미군이 낀 투시경의 녹색 빛 시야에서 진행되고 있으므로 표면적으로는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관객인 내가 영화 속 요원들의 시점으로 그 시공간을 따라가고는 있지만, 무언가에 의해 그 시선과의 동일시에 실패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다. 나의 시선과 현장에 투입된 미군의 시선과 카메라의 시선이 하나로 통합된 이 완벽한 환영 속에서 빈 라덴을 찾아 사살하기까지의 스릴, 긴장, 해소의 쾌감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게 하는 무언가가 여기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이론가 피터 월렌은 ‘응시 이론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카메라와 등장인물, 그리고 관객의 3중적 동일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과의 동일시를 유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편한 거리감을 만들어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관객인 우리가 등장인물의 생각, 동기 같은 것들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단지 그의 지각만 공유할 때 동일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등장인물에 대한 외부 시선을 통해서만 라캉이 ‘타동성’이라고 부른 것을 통해서만 심리학적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의 논리를 전적으로 이 영화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이다. 하지만 위의 장면이 주는 이상한 느낌에 대해 중요한 힌트 하나를 얻을 수는 있다. 상대의 시점이 무력화되거나 아예 삭제되고 모든 상황이 투시경 속 ‘우리의’ 시선으로 봉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우리’ 안에 심리적으로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이유는 놀랍게도 거기 ‘우리’를 응시하는 상대의 시점이 없기 때문이다. <허트 로커>에서 여기저기 잠복한 타자의 응시가 우리의 불안을 자아냈다면, 여기서는 반대로 우리의 시선이 투시경의 시야를 벗어나 상대의 응시에 닿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우리의 불안이 나온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제로 다크 서티>의 전투장면이 미군의 시선으로만 진행된 데 대해 마치 과거 할리우드의 베트남전 영화들이 서구 중심적인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본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비판한다면, 그 비판은 틀렸다. 이 영화들이 타자를 편견어린 시선 속에 가두고 자신의 시선에 우월성을 부여한다면, 캐스린 비글로는 적어도 이 장면에서만큼은 타자의 시점이 삭제된 상태에서 내가 점유한 시선이 실은 얼마나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그것이 캐스린 비글로의 의도는 아닐지라도 이 녹색 빛의 세상은 <허트 로커>에서 마약에 취한 듯 전쟁에 중독된 군인들처럼 병적으로 흔들린다.

우리는 모두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게 <제로 다크 서티>의 클라이맥스인 이 전투장면은 마침내 빈 라덴을 사살하여 이 길고 지난한 서사를 끝내는 장면, 혹은 우리에게 그 현장에 입회하게 해서 쾌감을 선사하는 장면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뭔가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스며 있다. 그건 앞서 말한 것처럼 장면 내의 일방적인 응시가 주는 불안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9.11 테러에서 시작된 이 긴 서사의 종결 앞에서 머뭇거리거나 두려워하고 있다는 인상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2011년 5월, 우리는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되었으며, 오바마 대통령이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빈 라덴의 시신이 공개되지 않은 까닭에 그의 죽음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 알카에다의 인정으로 그의 죽음은 받아들여졌다. 그러니까 현실의 우리는 빈 라덴의 시신을 실은 직접 본 적이 없다. 영화에서 군인들은 빈 라덴으로 추정되는 남자를 쏴 죽이고 나서 얼마간 그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다. 그들의 카메라 렌즈에 잡힌 시신은 얼굴이 뭉개지고 흐릿한 형체로 보일 뿐인데, 그때 한 군인이 가족으로 추정되는 소녀에게 죽은 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그러나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더는 아무도 묻지 않으며, 그 숏은 이상하게도 그냥 지나가버린다. 이후 마야가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빈 라덴의 죽음을 공식화하는 장면에서도 영화는 시신의 정면을 찍지 않는다. 우리는 마야가 본 것을 보지 못한다. 아니, 마야는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영화는 그 시신이 빈 라덴이라고 확언할 수 있는 몇몇 순간들을 이처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지나쳐버리고 만다. 빈 라덴의 은신처에 대해 100% 확신을 말했던 마야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남겨진 그녀의 얼굴은 확신의 희열이 아니라 불확신의 피로로 뒤덮인다.

그러니 <제로 다크 서티>가 고문을 필요악으로 인정하거나 고문으로 이룬 성취를 옹호하는 영화라고 단정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이것은 고문과 복수라는 행위로도, 인간의 눈을 넘어서는 지각체계로도 더이상 다가갈 수 없는 이 세계의 어떤 지옥 앞에서 공허와 불안에 시달리는 영화에 가깝다. 이것은 적확한 행위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차라리 그 모든 것을 늪에 빠뜨리는 무력한 시선에 대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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