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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세계의 양면 <어둠 속의 빛>

1943년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 르보프, 매일같이 학살이 자행되는 이곳에는 어지러운 시절을 틈타 돈벌이를 하는 기회주의자들도 있다. 소하(로버트 비엑키에비츠)도 그중 하나다. 그는 원래 하수도 관리인이지만 빈집을 털고 좀도둑질을 하는 것으로 쏠쏠한 부수입을 챙기며 살아간다. 어느 날 소하는 격리지역을 탈출한 유대인들과 하수도에서 마주치게 되고, 이들의 은신을 돕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돈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국 유대인들의 편에 서게 된다.

소하는 14개월간 11명의 유대인들을 지하수로에 숨겨줬던 실존인물이다. 이들의 절박했던 상황을 담아 로버트 마셜은 <르보프의 하수도에서>라는 책을 썼고, <어둠 속의 빛>은 이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아그네츠카 홀랜드 감독에게 소하의 이야기는 감독의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다. 그녀의 조부모는 격리지역에서 죽임을 당했고, 어머니는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 나치에 대항했던 지하그룹 일원으로 알려져 있다. 홀랜드 감독은 소하를 비롯한 6천명 이상의 폴란드인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에게 ‘어둠 속의 빛’이었던 이 의인들에게 영화를 헌정한다. 그녀는 앞서 동시대를 배경으로 <유로파 유로파>(1990)를 찍은 바가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역시 실존인물인 유대인 소년은 독일과 러시아 양 진영을 오가며 참혹한 시대를 기적처럼 살아낸다. 격렬한 공포를 버텨내는 자의 실존을 통해 휴머니티를 정의했다는 점에서, <어둠 속의 빛>은 이 작품의 연장선상에 있다.

유대인들이 숨어 있는 지하 공간은 하나의 지옥도를 이룬다. 미로처럼 뻗은 지하수로 여기저기에는 쥐와 오물, 그리고 시체들이 뒤섞여 있다. 어둡고 폐쇄적인 공간이 주는 현장감이 강력하기에, 유대인들의 공포와 불안에 이입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들은 소하처럼 결점이 있는 인간이고, 수시로 폭력적인 면모를 노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감독은 불완전한 인간들이 오직 생존을 위해 부대끼는 동안, 그 속에서 일어나는 기적들도 함께 보여준다. 누군가가 사랑하는 이를 배신하고 도망간 자리에서 다른 누군가는 새롭게 사랑에 빠진다.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는 살인을 하고 누군가는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아이는 노래를 부른다. 홀랜드 감독은 어둠과 옅은 빛줄기로 상징되는 지하세계의 양면을 담아내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고, 이를 통해 소하의 실화를 감상적인 영웅담이 아니라 어둡고 치열한 휴먼드라마로 만들어냈다.

유대인 학살 주제에 대해 이미 많은 영화가 만들어졌기에, 과연 또 다른 버전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홀랜드 감독 역시 이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홀로코스트의 중요한 문제는 아직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어떻게 이 극악한 범죄가 가능했으며 여전히 유사한 사례가 지구상에 존속할 수 있는지”의 문제다. 그녀는 홀로코스트가 “인류 역사의 예외적인 사건인지, 아니면 인간 본성의 어두운 진실을 드러내는지”의 문제도 온전히 탐구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물론 이 질문은 중요하다. 하지만 <어둠 속의 빛>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오직 절반의 답만을 전할 뿐이다. 영화가 피해자들과 희생을 무릅썼던 조력자들의 이야기만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제기한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가해자의 입장에 대한 용기있는 탐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절반의 대답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홀랜드의 영화는 인간의 실상을 까발리면서도, 놀라운 관능으로 그것을 감싸안는다. 육체의 현존을 통해 이를 관철시키는 화법은 여전히 단단한 힘을 발휘하며, 결국 시대를 경유해 우리를 돌아보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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