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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의 컬처 아일랜드] 땡큐, 유럽 B무비의 제왕

<드라큘라 백작> <밤피로스 레스보스> 등을 만든 헤수스 프랑코 타계

헤수스 프랑코.

지난 4월2일 유럽 B무비의 제왕 헤수스 프랑코가 세상을 떠났다. 미국에 로저 코먼이 있다면 유럽은 단연 헤수스 프랑코의 영역이다. 헤수스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영화 활동을 해왔다. 감독의 직함으로 때론 촬영감독으로, 내친김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각본을 쓰고, 프로듀서로 현장을 통제하면서 정열적인 영화 제작의 길을 걸어왔다. 그가 연출한 작품들은 정확한 편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광범위하다. 헤수스 프랑코란 이름으로 영화를 만드는가 하면, 가명으로도 꾸준하게 작업해서 수십명의 감독이 해왔을 일을 혼자 뚝딱 해치웠다. 대략 200편 이상의 싸구려 B급, C급영화들을 찍어냈고, 그 너머엔 정신이 아찔해지는 불량품 Z급영화까지 즐비하다. ‘유럽 트래시의 제왕’으로까지 불릴 정도면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떠한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단순히 다작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명성을 거머쥘 순 없다. 좋건 싫건 헤수스의 영화들은 크고 작은 영향력을 행사했고, 지금까지 컬트영화로서 사랑받는 작품도 적지 않다.

헤수스는 1930년 5월12일 스페인 출생으로 유년 시절부터 유니버설 호러영화들을 보며 성장했다. 이 당시에 본 호러영화들이 훗날 그의 영화 작업에 큰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그의 문화계 참여는 음악공부로 시작되었으나, 국립영화연구소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하면서 진로가 결정되었다. 그의 명성은 <드라큘라 백작> <밤피로스 레스보스>와 같은 흡혈귀영화의 성공으로 시작되었고, 특히 <밤피로스 레스보스>의 대성공은 헤수스를 일약 유럽 호러 거장에 올려놓았다. <밤피로스 레스보스>는 몽환적인 분위기에 특유의 나른한 영상미, 관능적인 여배우들의 에로틱한 정사로 매료시켰다. <밤피로스 레스보스>의 히트는 유럽에서 유행한 레즈비언 뱀파이어영화들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헤수스의 영화가 질적으로 나락에 떨어지게 된 계기는 <밤피로스 레스보스>의 여주인공인 솔레다드 미란다의 죽음이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헤수스는 자신의 영화를 대표할 뮤즈를 잃은 절망감에 빠진다. 이 시기부터 터무니없는 저예산 에로틱 호러물을 비롯해 범죄영화, 정글을 무대로 벌어지는 약탈과 강간, 카니발리즘 등 존재하는 거의 모든 영화 장르를 섭렵한다.

헤수스 영화들의 대부분은 시간낭비나 다름없는 졸작들이 많다. 개연성 없는 이야기, 배우들의 발연기, 뜬금없는 폭력과 섹스 신들은 일반 관객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세상엔 A급영화만 존재할 순 없다. B급이 있어야 A급의 가치가 올라간다. B급 또한 하위 레벨이 존재해야 돋보이기 마련이다. 헤수스의 영화는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한다. 광적일 정도로 영화를 만들게 했던 그의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돈을 끌어오는 프로듀서로서의 탁월한 재능 역시 분명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대표작은 변함없이 컬트영화로서 기억될 것이다. 10대에서 20대를 거치며 접했던 헤수스의 영화는 싸구려 장르영화의 가치와 매력을 깨닫게 해주었다. 영화가 대규모 산업으로 성장하고, 시스템화되면서 앞으로 헤수스와 같은 감독을 만나기란 불가능해졌다. 열정적인 남자, 그의 명복을 빈다.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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