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전설, 현재진행형
정리 이후경(영화평론가) 사진 최성열 2013-04-16

<전설의 주먹>의 아역 4인방 - 박정민, 구원, 박두식, 이정혁

카메라 앞에 자리잡은 네 소년에게 별다른 지시는 필요없었다. 사소한 것들로 투덕거리다가도 슛이 들어가면 한 화면 안에서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지난여름이 그들에게 일으킨 화학작용 덕택일 것이다. 다른 수많은 영화의 무술팀이 서울액션스쿨에 떴다 저무는 3개월 동안 그들은 서로 훅과 킥을 주고받으며 버텼고, 혹독했던 강우석 감독의 현장에서도 보란 듯이 함께 살아남았다. 그렇게 그들은 1987년 서울 일대를 주름잡았던 4인조 ‘전설’, 아니 ‘절친’이 되었다. 그 4인조란 임덕규 아역의 박정민, 이상훈 아역의 구원, 신재석 아역의 박두식, 손진호 아역의 이정혁이다. 이들이 회고하는 <전설의 주먹>의 그때 그 시절로 들어가보자.

씨네21_오디션 볼 때 지금 배역대로 지원했나.

박정민_내가 지원했던 역할은 없어졌다. 고민하다 재석과 덕규 중 덕규를 골랐다. <파수꾼> 때의 진중함으로 돌아가고 싶어서였다. 뭔가 진득하게 눌러내는 연기로. 지난 1년간 별 고민 없이 까부는 연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는 내가 싫더라.

구원_난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상훈이랑 덕규가 제일 멋있었라. 근데 내가 연기한다면 상훈이를 연기해야 사람들한테 그나마 이상훈답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정혁_나도 첫 오디션은 이상훈으로 봤다. 제일 접근하기 쉬운 캐릭터여서. 근데 어느 순간 이미 손진호가 돼 있었다.

박두식_난 원작에서부터 무식하지만 용감하고 자신감있고 의리있는 신재석이 맘에 들었다. 마지막에 쓸쓸하게 죽는 것도 임팩트가 강했고. 나중에 받아본 시나리오는 좀 달랐지만 그래도 나는 신재석이다, 라고 생각했다.

박정민

그들의 만남이 단번에 성사된 것은 아니었다. 2차 오디션 뒤 강우석 감독은 맞는 궁합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패를 이리 섞고 저리 섞어봤다. 그 지난한 과정 끝에 선택된 조가 그들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파주 서울액션스쿨에서의 지옥훈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몸풀기로 1시간 조깅은 기본, 직접 배우끼리 주먹과 발차기를 주고받는 훈련도 한없이 이어졌다.

구원_첫날 정두홍 무술감독님께서 보자마자 ‘호구’를 입고 오라고 하시더라. 태권도할 때 쓰는 보호대 같은 거다. 입고 왔더니 둘씩 서라고 하셨다. 섰더니 발로 차라고 하셔서 살짝 찼다. 그러니까 제대로 안 찼다고 “뭐하는 거야!”라며 나를 뻥 차셨는데, 10m쯤 날아갔다.

박정민_자유로가 지옥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구원_정민이 형이 제일 고생이었지. 우리는 발차기와 주먹질만 배웠는데 형은 권투까지 배워야 했으니까.

박정민_캐스팅 확정받은 날 담배를 끊고 매일 헬스, 복싱, 액션스쿨을 돌아가며 10∼12시간씩 운동했다. 근데 두달쯤 지나서 정두홍 감독님이 왜 이렇게 못하냐고.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담배를 다시 안 피울 수가 없더라. (웃음)

이정혁_정두홍 감독님이 악에 받치게 해서 더 하게 만드는 스타일이신 것 같다. 액션은 비슷해도 눈빛이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셔서 부러 더 몰아붙이셨다.

구원_그런 과정을 함께 겪은 게 감정몰입에도 도움이 많이 됐다. 형이 경기에 졌을 때도 진심으로 다같이 울고.

박두식_감독님은 울지 말라고 막 말리시고.

박정민_그때 뒤에서는 ‘임덕규! 임덕규!’ 불러주고 앞에서는 관장님이 다 때려부수면서 ‘이건 무효야!’라고 하시는데, 액션스쿨에서 받았던 모든 수모와 굴욕이 파노라마처럼 촤르르르 지나가더라.

씨네21_복싱이나 발차기 스타일은 어떻게 다듬었나.

박정민_알아서 찾아봤다. <주먹이 운다>의 마지막 대결장면이 약속한 합이 아닌지도 모르고 한 프레임, 한 프레임 돌려가면서 보고 섀도복싱도 해보고 그랬다.

구원_나는 나를 봤다. (일동 웃음) 발차기가 주특기인데 멋있는 영상이 있어도 따라할 자신도 없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발차기 중 제일 멋있는 걸 연구했다.

씨네21_박두식씨는 몸치였다고.

박정민_조감독님이 액션스쿨에 와서 보시더니 계속 ‘어떡하지’만 연발하시더라.

구원_두식이가 농구하는, 진짜 사랑스러운 장면이 있는데 그게 연기가 아니다.

박두식_맞다! (다들 무시)

구원

3개월 동안의 훈련을 마치고 드디어 첫 촬영에 돌입.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영화 현장 경험이 있든 없든 그들은 값진 한 테이크를 건지기 위해 만신창이가 될 각오를 해야 했다.

박정민_덕규가 체육관에서 연습하는 장면이 이 영화의 첫 촬영이었다. 부담감 때문에 전날 잠도 못 자고 떨리는 마음으로 현장에 갔는데, 시간이 남더라. 지쳐 보여야 하는 장면이라 몸 풀려고 계속 섀도복싱을 했다. 근데 그러다 촬영 전에 방전돼버린 거다. OK 나자마자 기절했다.

이정혁_난 처음부터 거의 NG가 안 났는데 그게 오히려 고민이었다. 나한텐 관심이 없으신가, 별 생각이 다 들고. 근데 첫 촬영은 원이가 할 말이 많을 거다.

구원_(한탄) 처음 두식이랑 붙는 신에 “너 어디서 왔냐”는 대사가 있다. 그게 내 인생의 첫 대사고, 첫 촬영이었다. 수백번 수천번 연습해서 걱정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현장에서 감독님이 컷, 하시니까 바로 패닉이 오더라. 감독님이 아무리 고쳐주셔도 금방 원래 억양으로 돌아가고. 그렇게 두 시간 동안 서른 테이크쯤 했나.

박두식_난 연극밖에 해본 적이 없어서 카메라워크나 앵글에 대한 생각 없이 캐릭터만 갖고 들어갔는데, 감독님이 바로 “너 뭐하는 놈이야!”라고 하시더라. 덕규랑 처음 붙는 신에서도 카메라를 못 맞추니까 “눈을 더 크게 뜨라고!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이렇게 움직여!”라고….

이정혁_어찌 보면 완성된 재석이는 강우석 감독님의….

박정민_아바타지. (웃음)

실전이 다가왔다. 때리는 ‘척’하는 연기와 맞는 ‘척’하는 연기를 그렇게 훈련했건만, 정직한 카메라 앞에서는 ‘척’으로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촬영이 진행되면서 자연히 맞는 연기의 고수와 때리는 연기의 고수가 갈렸다.

박정민_특히 정혁이 형이 ‘우끼’(맞는 척하는 연기-편집자)를 잘 받았다.

이정혁_내가 그쪽에 소질이 있는지 몰랐다. 맞는 건 그냥 맞고 아파하면 되니까.

구원_나는 첫날부터 맞는 연기가 안돼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재석이랑 공중에서 부딪히는 장면의 클로즈업을 따는데 아무리 실리콘이라도 주먹이 날아오니까 나도 모르게 반사신경이 작동해서 눈을 감거나 피하게 되는 거다.

박정민_정두홍 감독님이 실리콘 주먹을 갖고 시범으로 “안 아파! 안 아픈 거야!”라고 하시며 자기 얼굴을 막 때리는 데 실은 좀 아파 보였다.

박두식_나도 운동신경이, (일동 “없잖아”) 없지만, 조금은 있어서, 본능적으로 피하더라. 근데 고속카메라 클로즈업에선 다 보인다. 그래서 될 때까지 한 50대를 맞았다. 나중엔 귀가 마비돼서 까맣게 변하더라. 그 뒤로 단기기억상실증도 생긴 것 같다.

박정민_나는 때리는 연기가 더 많았는데, 리허설 때부터 정두홍 감독님이 옆에서 계속 더 세게 때리라고 하면 악에 받쳐서 연기인데도 흥분하게 되더라. 특히 나이트클럽 앞에서 형들과 싸울 때는 완전히 미쳐서 합도 없이 진짜 때렸다. 액션을 가장 통쾌하게 내질렀던 부분인 것 같다. 반대로 백골단한테 맞는 장면은 좀 찡했다. 이 친구들이 사회적 불공평함 때문에 이 지경이 되어가고 있는 게 마음으로 다가왔다.

이정혁

영화 현장이란 그런 곳이었다. 약속했던 합은 온데간데없고, 갑자기 새로운 합이 계속 발생하는 곳. 더군다나 그곳은, 현장의 즉흥성을 받아들이는 와중에도 고도로 경제적인 현장 운용으로 유명한 충무로의 베테랑 중 베테랑 강우석 감독의 현장이었으니.

박두식_점심시간에 배우랑 스탭들은 다 밥 먹고 있으면, 감독님은 혼자 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바꾸고 계셨다.

구원_근데 감독님이 두식이 대사를 주로 먼저 만드셨다.

박정민_맞다. 소풍 신에서도 두식이가 ‘임덕규, 이승훈, 둘 다 나와’라고 하면 대사가 많아진다.

이정혁_넷 사이에 스파크를 튀기는 캐릭터가 재석이었다.

구원_그래서 감독님이 재석이 캐릭터에 욕심을 많이 내셨던 것 같다. 두식이한테 요구하는 디렉션이 많았다. 복도에서 “신재석이다” 하는 것도 여러 가지 말투나 걸음걸이로 찍어보시고.

박두식_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연습 때 익힌 ‘쪼’가 바뀌니까.

이정혁_신인인 저희가 불안하셨을 거고, 그래서 리허설을 정말 많이 시키셔서 박힌 쪼들이 있었다.

박정민_그게 독이 된 면도 있었다. 현장에서 감독님 디렉션을 이해는 하는데 팍팍 해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정혁_액션도 현장 가면 다 바뀌었다. 액션스쿨 다닐 때 연습한 합도 결국 현장에서 새로운 걸 잘하기 위한 거였다.

박정민_근데 액션 연습은 진짜 도움이 되더라. 뭐가 바뀌어도 몸이 바로바로 움직이니까.

박두식

물론 액션보다 중요한 건 드라마였다. 아역 분량을 먼저 몰아 찍은 만큼, 그들에게는 드라마를 잘 다져놓아야 하는 부담이 있었을 터. 미로를 헤매던 그들에게 강우석 감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캐릭터의 힌트를 던져주었다.

이정혁_나는 캐릭터에 관한 디렉션을 일찍 받은 편이었다. 촬영 전부터 감독님이 말씀하셨다. 준호는 원래 재수없고 야비한 친구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다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냥 말해도 남들이 재수없게 듣는 거다. 그 말을 들으니 쉬워지더라.

박정민_감독님 디렉션이 참 정확하고 명쾌했다. 나한테는 그러셨다. “임덕규라는 인물은 좋은 사람이니까 너는 좋은 사람처럼 연기하면 된다.” 감독님의 그 말에 딱 정리가 되더라. 선배님들의 연기에서 레퍼런스를 따오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덕규는 그냥 좋은 사람이었던 거다. 그때부터 감독님 말만 잘 들었다.

박두식_나도 처음에 원작만 보고 굉장히 센 연기를 준비해갔다. 근데 감독님께서 “너는 그냥 너로 가. 눈만 크게 뜨고 막 우악스럽게 하면 돼”라고 하시더라. 아, 이게 분석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감독님이 보고 부족한 게 있으면 다른 버전으로 시켜보실 테니까. 방금 도미솔로 했으면 다음은 도미레로 해보라고 하시면서.

박정민_아, 감독님이 진짜 도미솔, 도미레, 라고 하셨던 건 아니다. (웃음)

이정혁_모니터 앞에 불려가면 주로 억양을 많이 고쳐주셔서 우리끼리 강우석 감독님 ‘음악교실’이라고 불렀다.

박정민_근데 감독님이 지적하는 강세나 어조나 발음이 엄청 정확하다.

구원_내 경우도 감독님이 이상훈은 어떤 캐릭터다, 라고 설명해주신 적이 한번도 없는데, 고쳐주신 발음이나 화술 안에서 따라가다 보니 저절로 이해가 되더라.

씨네21_성인 역과의 싱크로율은 얼마나 신경 썼나.

박두식_나는 윤제문 선배님이 나한테 좀 맞춰주신 것 같다. (다들 웃으며 부정)

박정민_난 반대로 내가 (황)정민이 형님한테 맞추려고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잘 안되더라. 얼마 전 영화를 본 지인이 그런 말을 해줬다. 초반에 덕규가 재석에게 맞고 있는 같은 반 친구를 무시하고 가려고 할 때, 미안해하는 황정민만의 표정이 상상되는데 영화엔 없다고. 아차, 했다.

이정혁_선배님들이 워낙 잘 알려진 분들이다 보니 자연히 ‘이때 선배님은 이걸 하시겠지’라는 상상이 될 수밖에 없다.

구원_난 우리만 최선을 다하면 강우석 감독님이 다 생각이 있으실 거라 믿었는데.

이정혁_그래서 우리 분량부터 찍으신 건지도 모른다. 부담 느끼면 끝이 없으니.

씨네21_10살 어린 고등학생을 연기하는 부담은 없었나.

박정민_<파수꾼> 때 윤성현 감독님이 해준 말씀인데, 감정의 골이 들어간 고등학생 역할은 고등학생에게 맡길 수 없다더라. 감정이 안 나온다고.

이정혁_그래도 컨펌이 안 날까봐 조감독님이 우리 나이를 좀 속였다.

구원_강우석 감독님은 아직도 우리 나이를 3살씩 적게 알고 계실 거다.

박정민_이건 무덤까지 가져가자고 했던 비밀인데.

박두식_이미 다 퍼졌어, 형.

박정민_감독님이 잡지를 못 보시게 해야겠다.

<전설의 주먹>이 그들의 필모그래피에 어떤 전설로 남을까. 미래를 호언하기에 전설은 너무 거대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설’을 그들의 새파란 청춘을 새겨넣은 ‘추억’이라는 말로 바꾼다면 백번 장담해도 좋을 것 같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