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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규] 다른 분위기 같은 정서, 희한하더라
장영엽 사진 오계옥 2013-05-03

영화 <전설의 주먹> 원작 웹툰의 스토리작가 이종규

“미키 루크가 나오는 <더 레슬러> 같은 영화일 줄 알았다.” 웹툰 <전설의 주먹>의 스토리작가 이종규의 말이다. 원작이 워낙 무겁고 어두운 작품이라 “굉장히 무거운 누아르풍의 영화”나 “승부에 치중한 스포츠영화”가 나올 줄 알았단다. 그의 예상은 틀렸다. 강우석 감독의 영화 <전설의 주먹>은 이종규 작가의 예상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감동적인 드라마를 지닌 가족-스포츠영화로 탄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큰 줄기는 그대로 유지했다는 점에 이종규 작가는 관객으로서 만족하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스토리작가 이종규는 한국 만화계의 강우석 같은 존재다. 국내 최초의 격투기 만화 <P.K>, 하드보일드 무협 <PING>의 스토리작가로 이름을 알린 이종규는 거친 남자들의 세계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적인 우정과 성장담에 대해 누구보다 유려한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영화 <전설의 주먹>의 배다른 형제 같은 웹툰 <전설의 주먹>에 대해 그에게 물었다.

-영화 <전설의 주먹>을 보고 원작 웹툰을 다시 찾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래도 그럴 거다. 웹툰 <전설의 주먹>이 인기를 끌었지만, 메가히트작은 아니었으니까. 창작자 입장에선 작품을 많은 분들이 봐주시니 기쁘다. 한편으론 원작이 다소 마니악한 부분이 있어 영화와 많이 다르다는 점에 관객이 놀라겠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 시사회에 참석한 뒤 SNS에 “이제야 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진심으로 한 말이다. 관객 입장에서 영화를 재밌게 봤다. 제작 과정에서 연락을 받긴 했는데, 눈으로 직접 확인한 건 아니었거든. 어떤 영화가 나올지 상당히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고.

영화화는 계획된 프로젝트?

-웹툰 <전설의 주먹>의 영화화 제의는 언제 받았나. =정확히 2년 전이다. 웹툰을 3회 정도 연재했을 때부터 영화사에서 연락이 오더라. 10개 정도의 영화사가 관심을 보였고, 그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친분이 있던 장민석 작가(그는 영화 <전설의 주먹>의 각색을 맡았다)님이 “좋은 제작자가 있는데, 한번 만나보지 않겠냐”고 연락을 줬다. 작가님의 추천으로 미라클필름 김봉서 대표를 만났는데, 젊고 열정적인 분이라 한번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우석 감독님의 시네마서비스는 차후에 연락이 왔다. 강 감독님이 꼭 이 작품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더라.

-각색 과정에 도움을 주진 않았나. =장민석 작가님도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하더라. 마음대로 하시라고 했다. 어쨌건 나는 만화라는 완성품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게 영화화하건, 드라마화하건, 내가 최선을 다해 만든 작품은 따로 있기 때문에 나머지는 부차적인 부분이라 생각했다.

-원작 웹툰을 보면 이미 상당 부분 영화적인 내러티브를 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화 제의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인가. =사실 내가 소년만화를 굉장히 오래 해왔다. 2010년 4월 ‘다음’에서 연재를 시작한 <대작>이 첫 웹툰 작업이었는데, 그때부터 영상화에 대한 고려도 하면서 작품을 기획했었다. <전설의 주먹>은 특히나 그런 작품이다. 처음 스토리를 구상할 때부터 영화 스타일의 플롯을 짰고, 화면 역시 영화적인 느낌이 나도록 연출했다. 나름대로 나에겐 실험적인 방식이었는데, 아무래도 비슷한 문법으로 작업하는 영화쪽 분들이 눈여겨봤던 것 같다.

-그렇다면 작품을 영화적인 방식으로 구상하며 떠올렸던 배우들도 있을 법한데. =사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황정민씨다. 영화에서 정민씨가 연기하는 임덕규란 캐릭터는 만화상에서 거인처럼 나오잖나. 그래서 작업할 때는 오히려 이상훈 캐릭터(대기업 사원이며, 영화에선 유준상이 연기한다)를 만들며 정민씨를 떠올렸던 것 같다. 그리고 강우석 감독님이 영화를 만든다고 하시기에, 왠지 (<강철중: 공공의 적 1-1> <이끼> 등에서 함께 작업한) 정재영씨가 신재석(삼류 건달이며, 영화에선 윤제문이 연기한다)을 연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아무래도 그렇게 어느 정도 기대했던 배우들이 있다.

-캐릭터에 대한 원작의 내용이 영화에선 상당히 바뀌었다. 그 점이 짐작과는 다른 캐스팅의 이유가 아닐까. =나중에 장민석 작가님, 강우석 감독님에게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어떻게 작품의 굵은 줄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원작을 이렇게 싹 바꿀 수 있었냐고. 그건 정말로 제작진의 능력이다. 전혀 분위기가 다르면서도 인물이 가지고 있는 기본 정서는 그대로 가지고 갔던 거지. 예를 들면 영화에 나오는 신재석 캐릭터도 원작의 인물과 정서상으로는 거의 맥락이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윤제문씨가 연기한 신재석이 상당히 귀엽고 마음에 들었다. (웃음)

강우석과 내가 닮았다?

-강우석 감독은 시사회장에서 처음 만난 건가. =그전에 뵈었다. 감독님이 영화 촬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시점에서 연락을 주셨다. “이전에 미리 만나서 얼굴 보고 얘기를 했어야 예의인데, 원작자와 친분이 생기고 나면 작품을 마음대로 만드는 데 지장이 생길 것 같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아 이제야 연락을 하게 됐다.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더라. 그 뒤로 시사회, 뒤풀이 자리에서 두세 차례 감독님을 뵈며 느꼈던 점은, 굉장히 다방면에서 뛰어난 크리에이터란 거다. 흥행감독이란 타이틀이 괜히 만들어진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감독님과 내가 가진 작품의 정서가 굉장히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강우석 감독님이 인터뷰마다 “제목을 보는 순간 이건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를 난 알 것 같거든. 내가 처음 <전설의 주먹>을 ‘다음’에 연재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지인과 동료들이 제목에 대해 많이 걱정했다. 좀 촌스럽지 않냐고, 그런 제목을 쓰면 선입견이 생겨 독자들이 안 볼 것 같다면서. 그런데 난 그 제목이 마음에 들었거든. 약간 B급스럽기도 하고, 촌스럽긴 하지만 애수와 향수가 묻어 있는, 마치 초등학교 시절 동네 동시상영관에 걸려 있는 영화 같은 제목이었다. 강 감독님도 아마 ‘전설의 주먹’이란 제목을 보는 순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거다.

-원작 얘기를 좀더 해보자. 처음 <전설의 주먹>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있나. =처음 구상한 건 아마 4년 전이었을 거다. 해외 리얼리티쇼가 케이블TV에서 처음으로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쇼들을 보며 굉장히 복합적인 생각이 들더라. 출연자들을 도대체 어떤 시선으로 봐야 할지 몸둘 바를 모르겠더라고. 거부가 나와서 결혼할 여자를 고르는데, 저 여자들은 지금 저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저기 나와 있는 건가. 무슨 사연으로 출연하게 됐을까. 어찌 보면 참 저질스런 컨셉인데(웃음), 너무 자극적이고 재밌는 거다. 그런 리얼리티쇼의 출연자들과 시스템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게 됐는데, 그 무렵 가지고 있던 소재 중 하나가 학원폭력이었다. 학원폭력이 어떤 식으로 사회에서 순환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오디션 프로그램이란 소재를 합쳐 <전설의 주먹>을 구상하게 됐다.

-원작은 영화에 비해 훨씬 어둡고 비관적이다. =처음부터 의도했다. 작화를 맡은 이윤균 작가에게 색깔을 단톤으로 빼고 인물 표정도 굉장히 어둡게 묘사할 것을 주문했다. 가장 주안점을 뒀던 건 미디어의 폐해였다. <전설의 주먹>이란 프로그램을 보는 관객이나 미디어에 포위되어, 이 사회에서 어느 곳으로도 도망칠 곳 없는 주인공들의 답답함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이윤균 작가는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학과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난 사이다. 노련한 작화가들과 작업하다가 신인 작가와 함께한 이유가 있나. =이윤균 작가는 학교에서 굉장히 성실한 학생이었다. 엄청나게 성실한데, 엄청나게 재미없는 학생. (웃음) 아무 말도 안 하고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는 애 있잖나. 하지만 나는 그런 학생들이 만화가가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반짝반짝 빛나는 재능을 가져봐야 오래 앉아 그리는 사람을 이길 수 없는 게 이쪽 바닥이다. 졸업하고 이윤균 작가가 우연히 내 작업실에 놀러왔다. 어떤 게임회사에서 의뢰한 만화를 만들었는데 기획이 엎어졌다고 하더라. 안쓰러운 마음에 <전설의 주먹> 초안을 보여주며 “한번 연습 삼아 그려봐. 작업을 같이 할지는 그림 그려온 거 보고 생각할게”라고 반쯤 선생님 마인드로 말했는데 너무 열심히 해온 거다. 나도 좀 승부욕이 생기더라. 굉장히 어렵게 작업을 준비했다. 1회분만 열번 가까이 수정했다. 웬만한 사람은 도망갔을 텐데, 이윤균 작가의 노력 덕분에 결국은 나도 만족할 만한 수준의 작품이 완성되더라.

만화도 스토리작가가 따로 있다?

-원작에는 자전적인 에피소드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고 들었다. =남학생이라면 누구나 싸움 잘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심이 생기는 나이가 생물학적으로 있는 것 같다.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에 진학할 때쯤? 지금 생각하면 우스꽝스럽지만, 나 역시도 당시엔 그런 감정을 느꼈다. 그 시절의 설레던 느낌, 철없는 로망을 떠올리며 내가 살던 동네(중랑구)에서 들었던 가물가물한 기억을 조금씩 살려 과거 장면을 만들었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임덕규, 손진호, 이상훈, 신재석은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내 친구들의 이름이다. <전설의 주먹> 작업을 할 때도 최대한 그 시절의 느낌을 떠올리고 싶어 어렸을 때 뛰어다녔던 중랑천변에 자주 갔다.

-학창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을지 궁금하다. =중학교 시절까지 덩치가 큰 편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태권도 선수도 했었고. 운동부, 덩치가 있는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다니며 놀았다. 그러다보니 나는 즐거운 학창 시절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착각이란 걸 알게 된 적이 몇번 있다. 한때 ‘아이러브스쿨’이라고 동창모임을 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굉장히 인기였잖나. 나도 가입해서 “반갑다”고 글을 남기는데 별로 안 반가워하는 눈치인 거다. 아무래도 날 무서워했던 학생들 입장에선 그닥 반갑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그때 들더라고. 그런 경험이 만화에도 반영이 됐다.

-원작의 열린 엔딩에 대한 논란도 있더라. =처음부터 엔딩에 대해선 명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결말을 확실히 알려주는 엔딩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장면을 자세히 보면, 두 사람이 링 위에서 싸울 때 옷이 교복으로 바뀐다. 그렇게 그들이 가장 화려했던 시절, 본인이 생각하는 최고의 시절의 모습으로 다시 한번 시원하게 싸워보자는 느낌의 엔딩을 만들고 싶었다.

-한국에서 만화를 하며 스토리작가로 오래 활동해온 보기 드문 작가 중 한명이다. =아주 힘든 구조다. 만화란 게 결국 그림이 보여지는 매체라 독자들은 대부분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만화가를 기억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스토리작가가 따로 있다는 걸 모르는 작품이 대단히 많다. 아마 글과 그림 담당이 따로 있는 작품 중 스토리작가가 조명받은 만화는 <전설의 주먹>이 처음이 아닐까.

-얼마 전 웹툰 <글로리힐>의 연재를 끝냈다. 차기작으로 생각하는 작품이 있나. =지금 두 작품 정도를 준비 중이다. 영화쪽에서 주목을 받다 보니 약간 삐뚤어졌다. (웃음) 가장 만화다운 만화를 만들어보려 한다. 동양적인 판타지 작품 한편,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 작품 한편을 준비하고 있다.

웹툰 <전설의 주먹>.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만화다운 만화’가 어떤 것일지 궁금해졌다. “만화는 태생부터가 모든 주제와 소재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작가가 이런 세상이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곧바로 시작할 수 있다”는 부연설명이 돌아왔다. 제작비가 따로 필요없고 많은 사람들의 입김이 스치지 않아 손상되지 않은 상상력을 기반으로, 성실하게 다음 컷을 향해 전진하는 스토리작가와 작화가만이 존재하는 이 세상이 한국 영화계의 가장 좋은 광맥이 되고 있다는 점을 가벼이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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