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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누구의 추억인가요? 누구의 꿈인가요?
김혜리 2013-05-10

▲여행 갔던 친구가 중고서점에서 사다준 애니메이션 역사책 속에서 정성껏 오린 신문 스크랩이 툭 떨어졌다. 책 주인은 애니메이션 학도였나보다. ‘백설공주의 흰 머리’라는 제목의 기사는 디즈니 장편 <백설공주>의 50살을 감회에 젖어 기념했다. 그리고 나는 26년 전 이 기사를 다시 감회에 젖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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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때 자작나무를 탔다”는 프로스트의 시구와 유사한 어조로 말하자면, 나도 한때 ‘믹스 테이프’(mixed tape)를 만들었다. 누군들 아니었겠는가. 당시 음악은 뮤지션이 심사숙고한 배열에 따라 LP와 CD의 동심원에 모세의 십계처럼 새겨져 우리 손에 들어왔다. 우선은 인트로(intro)부터 아우트로(outro)까지 아티스트가 정한 순서와 사이를 지켜, 귀로 곡명을 판별할 때까지 듣는 일이 먼저였다. 다음에 한장씩 모은 신착 앨범들을 거듭 돌려 들으며 내 귀가 혹하는 트랙을 고르고, 그들의 총합이 47분, 60분 분량이 되면 공테이프에 경건히 옮겼다. 음악의 사유화는 그제야 완결됐다. 3분 미만의 짧지만 여운 강한 곡들을 꿰놓고 있다가 테이프 양면 끄트머리의 공백을 알뜰히 채우는 요령도 터득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는 곡목을 써넣을 수 있도록 예쁜 인덱스지를 팔았다. 내게 편집 개념을 처음 가르쳐준 건 교지 편집부 활동이 아니라 믹스 테이프 녹음이었다.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좋자고 하는 선물로 믹스 테이프만 한 예가 없다. 디지털 시대에도 친구끼리 MP3 재생 목록을 교환하고 공유하지만, 그것은 쉽게 재편될 수 있다. 그러나 친구가 준 믹스 테이프는 녹음기 앞에 쪼그리고 앉은 열일곱 어느 밤의 감정과, 돌아오지 않는 계절의 공기를 담은 채 밀봉돼 있다. (본인의 레이블 이름을 작명하고 고무지우개로 도장을 파서 찍어주는 친구도 있었다. 지금쯤 사업을 하려나?) 나 역시 많이도 만들었다. 대부분 이사 통에 버려졌을 나의 무수한 믹스 테이프를 생각하면, 유리병에 넣어 던진 편지들이 대양을 떠도는 광경이 떠오른다.

믹스 테이프의 추억을 뒤적이게 한 계기는 개봉작 <월플라워>다. 노스탤지어에 흠뻑 젖은 이 영화가 그리는 청춘의 정경은, 극중 주인공들의 교사와 의사로 분한 배우 폴 러드나 조앤 쿠색의 세대에 속한다. 영화의 한 대목에 TV시리즈 <가시나무새>(1983)의 테마가 흐르는 순간 분명해졌다. 20년가량 나이 어린 배우들이 내 청춘의 유행을 재연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이 어떤지 나도 결국 알게 된 것이다. 주연배우 이즈라 밀러, 로건 레먼, 에마 왓슨에게 달려가 묻고 싶었다. 그들이 연기한 인물들의 행태를 이해하겠냐고, 우스꽝스럽진 않냐고, 우리는 연결되어있냐고. 그들은 당연히 끄덕일 것이다. 나 역시 <젊은 느티나무>나 <호밀밭의 파수꾼> <수레바퀴 밑에서>를 친구의 일기로서 읽었으니까. 청춘은 절반의 현실과 절반의 문화적 간접체험으로 형성되는데, 책이건 음악이건 간접체험의 대부분은 이미 중년에 이른 예술가들의 회고담이다. 우리는 상속을 피할 수 없다. 유일무이한줄 알았던 나의 청춘은, 앞 세대의 지체된 청춘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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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망상과 정신분열 증세가 극중에 등장하는 영화는 한달에도 두세편은 나온다. 그러나 제프 니콜스 감독의 <테이크 쉘터>가 불안증을 앓는 주인공 커티스(마이클 섀넌)와 주변 사람들을 취급하는 매너는 보기 드물게 신중하다. 커티스는 매일 밤 연속극처럼 이어지는 종말의 악몽에 시달린다. 꿈에서 깨어나도 여전히 몸에 남아 있는 통증과 징후는 커티스로 하여금 온갖 현실적 무리를 무릅쓰고 앞뜰에 방공호를 파게 만든다. <테이크 쉘터>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이 모든 것이 분열증적 환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장본인도 절절히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내력이 있다. 커티스에게는 정신장애가 있는 어머니가 있다. 그녀는 열살 먹은 커티스를 슈퍼마켓 주차장에 내버려두고 사라졌다가 며칠 뒤 쓰레기를 주워먹는 모습으로 발견됐다. 남자는 정신병력이 유전됐을 가능성을 고려한다. 동시에 어떤 경우에도 엄마처럼 가족을 버리진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논리적 판단이 공포를 몰아낼 수는 없다. 커티스는 자신을 괴롭히는 악몽이 망상이건 아니건 가족의 곁에 머무르며 일상을 버틴 채 어떻게든 공황 상태를 다스리는 현실적 방도로, ‘미친 짓’으로 보이는 방공호 파기를 선택한다. 즉, 커티스를 움직이는 힘은 완전히 판단력을 상실한, 순전한 광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필사적으로 공포와 광기를 순치하려고 하는 정상인이다. 영화에서, 뭇사람들이 “정신병자라 그러려니” 기대하는 방식으로 커티스가 폭발하는 장면은 딱 한 군데 있다. 제프 니콜스 감독은 마음에 병이 든 커티스를 사회에의 성가신 위협으로 묘사하지도 않고 미화하지도 않는다.

더욱 감탄스러운 전개는 커티스의 이상행동이 낳은 최대 피해자인 아내 사만다(제시카 채스테인)의 대응이다. 제정신이 아닌 남편에게서 달아나 어린 딸을 보호하고 싶기도 하련만 사만다는 남편이 독감에라도 걸린 것처럼 행동한다. 그녀가 보기에 남편의 불안은 물론 턱없는 망상이지만, 지금 급선무는 “당신은 틀렸고 이건 미친 짓이다”라고 바로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커티스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고 기다려주는 일임을 사만다는 용케도 이해한다. 이 광경이 더 감동스러운 까닭은 가정의 위기가 닥칠 때까지 <테이크 쉘터>가 결코 커티스와 사만다를 유별나게 금슬 좋은 부부로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한다는 의미야”라고 말하는 사만다는 <아무르>에서 죽어가는 아내 옆에 서 있던 조르주를 새삼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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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크 쉘터>가 시작된 지 10여분이 지났을 무렵 한 관객이 어둠을 헤집고 상영관에 들어왔다. 그는 빈 좌석이 있음에도 상영관 벽에 기대어 섰다. 보다가 도중에 나갈 계획일까? 하지만 그는 약 110분 동안 선 채로 영화를 보았다. 내 자리는 복도쪽 끝 좌석이었으므로 이 관객의 실루엣은 내 시야 가장자리에 내내 걸쳐 있었다(스크린을 가린 건 아니다). 다리 아플 텐데, 가방이라도 내려놓지,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극장에서 종종 일어나는, 방해라면 방해고 아니라면 아닌 미묘한 상황이다. 좌석에 앉아서 보지 않으시겠냐고 속삭여볼까 하는 충동이 여남은번 일었지만 결국 참았다. 혹시 그 관객에게 영화를 서서 봐야만 할 남모를 불안 증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서구 평론가들은 제프 니콜스 감독을 차세대 대런 애로노프스키라고 전망하기도 하고 데이비드 O. 러셀에게도 빗댄다. <테이크 쉘터>에 대해서도, 코언 형제의 <시리어스맨>부터 M. 나이트 샤말란의 초기작까지, 초현실을 끌어들여 현대 미국의 신경증을 이야기한 작품들이 거명된다. 내게 <테이크 쉘터>는 누구보다 스티븐 스필버그를 생각하게 만든다. 장르를 막론하고 스필버그의 영화 지하에는 묵시록적 불안이 흐른다. 두려움의 표적은 홀로코스트일 때도 있고 우주로부터의 공습일 때도 있다. 나는 스필버그 영화에서 발견되는 가장 강력한 이미지가 시체 더미라는 점을 머리에서 지울 수 없다. <우주전쟁>에서 달빛을 받으며 강물을 타고 떠내려가는 시신들, <링컨>의 군사병원 바깥에서 대통령의 아들이 목격하는, 잘려진 팔과 다리의 산. 이 압도적인 숏들은 언제나 이야기가 반드시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 자리에, 필요를 넘어서는 강렬한 필치로 선연히 새겨져 있다. 그래서 도리어 ‘떼죽음’의 이미지가 스필버그를 얼마나 홀리고 있는지 짐작하게 한다. <미지와의 조우>는 외계인과 더없이 황홀한 랑데부로 마무리되지만 거기로 달려가기까지 주인공이 겪은 과정과 포기한 것들을 돌아보면 매우 끔찍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테이크 쉘터>의 커티스와 <미지와의 조우>의 로이가 겪는 경험은 한 꺼풀 벗겨놓고 보면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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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트 앤 본>에서 아들을 무등 태운 아빠

<러스트 앤 본>의 알리(마티아스 쇼에나에츠)는 말로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른다. 다섯살 난 아들 샘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뜻대로 안되면 멱살을 잡는다. 움찔하면서도 아이는 웬일인지 아빠를 겁내지 않는다. 자크 오디아르 감독은 어눌한 이 남자의 진실을 몸의 이미지로 대변한다. 땡전 한푼 없는 부자가, 줍고 훔친 음식으로 끼니를 때워가며 낯선 도시에 도착했을 때 아빠는 아들을 무등 태우고 있다. 알리의 어깨에 짐짝처럼 얹혀 두팔을 축 늘어뜨린 샘의 모습은, 대화를 넘어선 부자의 육체적 친근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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